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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고종의 을사조약 승인과 언론의 확인없는 오보

by 스튜디오윤 2023. 10.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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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회주의로 일관한 고종

고종은 몸이 불편하다면서 알현을 거절하고 대신들과 어전회의를 열었고, 하야시 공사는 휴게실에서 기다리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이 날 어전회의에서 고종은 "이토 대사가 말하기를 이번 조약 조문과 관련하여 문구를 더하거나 고치려 하면 협상의 길이 있지만, 거절하면 이웃 나라 간에 좋은 관계를 유지할 수 없을 것이라고 했다. 조약 문구를 변경하는 것이 가능할 듯하다"라고 발언했습니다.

어전회의가 끝나고 대신들이 휴게실로 나오자 하야시 공사가 회의 결과를 물었습니다. 한규설은 '"황제 폐하는 협상하여 잘 처리하 라는 뜻으로 지시했으나 우리 여덟 사람은 반대 의견을 거듭 말씀드렸다"라고 대답했습니다. 하야시 공사는 "당신네 나라는 전제군주국가이니 황제 폐하의 지시가 있었다면 이 조약은 순조롭게 체결되어야 한다. 여덟 대신들이 폐하의 명을 거역하였는가? 이런 대신들은 조전에 둘 수 없다. 특히 참정 대신과 외부대신을 갈아야겠다"라고 폭언했습니다.

11월 17일 오후 8시경 이토 특사가 조선 주둔군 사령관을 거느리고 입궐했습니다. 이토가 고종에게 알현을 요청했으나 고종은 대신들에게 협상하여 잘 처리할 것을 명했으니 대사가 타협의 방도를 강구해 주기 바란다는 메시지를 보냅니다. 고종의 메시지를 받은 이토는 한국의 대신들과 회의를 열어 개개인에게 조약 체결에 대한 찬반 의견을 물었습니다. 고종의 양해 하에 이토 특사가 대신 회의를 주관하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그 결과 조약의 체결에 반대한 대신은 참정대신 한규설과 탁지부대신 민영기 두 명이었고, 나머지 6명은 찬성 혹은 묵시적 찬성 입장을 보였습니다.

 

대한제국 황제의 조약체결 승인

잠시 후 고종은 "조약문 중 보태거나 깎을 것은 법부대신이 일본 대사, 공사와 교섭하라"라고 어명을 내렸습니다. 대한제국 황제가 조약 체결을 승인한 것입니다. 그리하여 조약문 수정작업에 돌입하 게 됩니다. 이하영 법부대신이 제1조의 '일본 정부가 외국에 대한관계 및 사무를 감리 지휘한다라는 조항 가운데 "모두 자기 뜻에 대로"라는 표현의 삭제를 요구했고, 이토가 이를 수용했습니다. 이완 학부대신은 제3조의 통갑 권한을 분명히 해야 한다면서 "외교 문제에만 국한시키고 내정은 간접 하지 않는다"는 내용을 명기할 것을  요구하였습니다. 이토는 이 의견의 접수를 거부하고 "외교에 관한 사항 감리하기 위해 경성에 주제 하고"라는 문구를 삽이하는 선에서 동의했습니다. 통감의 내정간섭 불가를 명문화하려던 이완용의 의견을 이토 히로부미가 거부한 것입니다.

권중현제를 농상공부대신이 황실의 안녕과 존엄 유지를 보장한다"는 조항의 삽입을 제의하자 이토는 이를 수용하여 관련 내용을 담은 제5조를 신설했습니다. 그 결과 일본이 미리 준비해 온 조약 내용은 4개 조항에서 5개 조항으로 늘어나게 되었습니다.

 

이완용이 아니라 고종이 '조약체결' 어명 내려

이토가 직접 붓을 들어 문안수정 작업을 했고, 이 내용을 정시한 다음 고종의 재가를 받아 외부대신 박제순과 일본 공사 하야시 사이에 공식으로 조약이 체결된 시간은 11월 18일 오전 1시였습니다. 조약 체결 직후 고종은 이토 특사에게 "새 협약의 성립은 두 나라를 위해 축하할 일이다. 집은 신병으로 피로하지만 당신은 밤늦도록 수고했으니 얼마나 피곤하겠소"라는 위로의 칙어를 내렸습니다.

이것이 주요 사료들을 통해 정밀 복기한 을사조약 체결의 경과입니다. 그 과정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을사조약 체절을 결정한 사람은 이완용 등의 을사오적이 아니라 고종이라는 사실이 명백하게 드러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완용과 네 명의 대신이 을사오적으로 몰리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요?

11월 18일 아침에 외교권을 일본에 넘기는 보호조약이 지난번에 체결되었다는 소식이 알려지면서 장안은 비분과 탄식으로 들끓었고, 상가는 항의를 위해 철시했습니다. 곳곳에서 박제순, 이완용, 이지용, 권중현, 이근택을 '을사오적'으로 지목하고 "이 역적들을  처단하라"는 상소가 쏟아졌습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격렬한 비난의 표적이 된 것은 이완용이 아니라 외무대신 박제순이었습니다. 당시 이완용은 며칠 전 입각한 신참 학부대신에 불과했습니다. 대부분의 상소문은 “폐하가 종묘사직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치겠다고 맹세했는데 역적들이 임금의 뜻을 어기고 조약을 체결했으니 임금을 욕 보인 신하는 처단하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사실확인 없이 상소문의 내용만 보도

영국인 베델 창간한 대한매일신보를 비롯한 언론들은 사실 확인도 하지 않고 상소문 내용을 제보받아서 제멋대로

"황제는 끝까지 반대했으나 을사오적들이 일본에 굴복하여 보호조약을 체결했다"라고 보도했습니다. 그 결과 "고종이 을사조약에 반대했다는 허구의 신화가 만들어졌고, 이것이 오늘날까지 전해져서 역사적 사실로 굳어져버린 것입니다.

조약이 체결될 당시 신문이 그에 관해 오보를 내거나 그에 일반 백성이 직분 하여 이완용을 위시한 '을사오적'을 망국의 주범으로 저주한 것은 그런대로 있을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런데 114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우리 한국인이 망주의 책임을 사오적에게 묻는다면 그것은 심각적 정신문화의 지체를 의미합니다. 조선왕조의 멸망은 조선의 국가체제가 총체적으로 실패한 것을 의미합니다. 그에 대한 자각적 인식이 아직도 결여되어 있음은 우리 한국인이 여전히 대한민국의 건국을 포함한 지난 20세기의 역사를 제대로 이해하고 있지 못함을 의미합니다. 이는 번의 위기를 초래하고야 실로 적지 않은 걱정거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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