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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고종의 실체_자신의 목숨만 지키기 위한 비굴함

by 스튜디오윤 2023. 10.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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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황제에게 '조선 보호' 요청

고종은 1896년 2월 11일 새벽에 왕세자와 함께 궁녀 복장으로 변장하고 궁궐에서 탈출하여 서울 정동의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했습니다. 이 피신은 주조선 러시아 공사가 계획하고 러시아 군인의 지원과 호위를 받아서 단행한 것입니다. 러시아 공사관에 도착한 고종은 가장 먼저 일본과 가깝게 지내던 친일 관리들을 처단하라고 명령을 내립니다. 어명을 받은 친위부대가 출동하여 총리대신 김홍 집을 살해하여 시체를 청계천에 내팽개쳤고, 농상공부대신 정병하, 탁지부대신 어윤중은 군중들에게 맞아 죽었습니다.

10여 명의 다른 대신들은 천신만고 끝에 일본으로 탈출하여 망명했습니다.

아관파천 기간 중인 1896년 5월 말, 고종은 러시아 황제 니콜라 이 2세의 대관식에 민영환을 조선 대표로 파견했습니다. 민영환은 베베르 공사의 주선으로 러시아 요원들의 보호를 받으며 모스크바로 가서 니콜라이 2세를 알현했습니다. 이 자리에서 민영환은

"조선을 러시아의 보호력으로 삼아 달라"라고 청하였습니다. 그러고선 외무대신 로바노프, 재무대신 비티와 면담하여 러시아 군대의 조선 국왕 보호, 러시아 군사고문관 파견 등을 요청하였습니다.

두 달 후인 7월 29일 러시아는 군사교관단을 조선에 파견했습니다. 러시아 교관단은 조선의 궁성호위대를 훈련시켰고, 이 경비대는 1897년 5월, 환궁한 고종이 지켜보는 앞에서 러시아식 사열을 했습니다.

 

조선군대의 오락가락훈련

조선 말기 조선의 군대는 일본 교관을 초빙하여 별기군을 창설해서 일본식으로 훈련을 받다가 임오군란이 일어나자 청의 군대 편제로 바꾸고 청교관들의 조련을 받았습니다. 또 미국의 퇴역 장군을 초빙하여 미국식으로 훈련하다가 다시 일본군의 훈련을 받아 훈련대를 양성했습니다. 이 훈련대가 민비 시해에 동원되어 믿을 수 없게 되자 이번에는 러시아 교관을 초빙하여 러시아식 훈련을 시작한 것입니다. 이 무렵 조선이 일사천리로 친러 정책을 추진하는 모습을 지켜본 주조선 미국공사 알렌은 "조선 문제는 다 끝났다"라고 허탈해했습니다. 러시아 군사교관단은 궁성호위대를 훈련시킨데 이어 러시아군의 지휘를 받는 6,000여 명의 조러 연합군 결성을 시도했습니다.

하지만 러시아의 조선 진출 정책은 만주 침투를 주장하는 세력들이 득세하면서 만주 진출로 선회하게 됩니다. 1897년 12월 18일 러시아가 일본이 반환한 랴오둥반도의 요충인 뤼순과 다렌 회항을 조차하여 극동지역에서 부동 확보에 성공한 러시아는 조선에 대한 전략적 관심이 크게 줄었고, 이 와중에 조러 연합군 계획은 폐기되었습니다. 조선에 대한 관심이 식은 러시아는 1900년 7월 일본에 한반도를 분할하여 "조선에서 러, 일 양국의 세력범위를 확정 하자"고 제안했습니다. 만약 일본이 이 제안을 받아 들었다면 한국 은 1945년이 아니라 1900년에 남북으로 분단되어 러시아와 일본의 보호령이 되었을 가능성이 농후합니다.

 

일부 학자들, 고종을 개명군주라고 미화

청일전쟁을 끝내기 위안 시모노세키 강화조약이 체결된 1895년부터 러일전쟁이 개전된 1904년까지의 10년은 조선의 입장에서 보면 국가 개혁을 통해 근대국가로 발돋움할 수 있는 마지 막기회였습니다. 조선의 국가 지도부는 그 기회를 허송세월하고 중국, 일본, 미국, 러시아 등 외세를 끌어들여 국가 독립을 지키려고 발버둥을 쳤습니다. 한국 근대사에서 '잃어버린 10년'이라 부를 수 있는 이 시기를 국가 지도부가 유익하게 사용했다면 조선의 미래는 긍정적으로 변할 수 있었을 것이고, 극동과 세계의 역사도 상당히 변했을지 모릅니다.

일본은 러시아와 전쟁을 하여 조선에서 러시아 세력을 쫓아내고 조선을 보호국으로 만들었습니다. 고종은 1882년 임오군란 때 쿠데타군이 궁궐에 난입하여 민비를 죽이려 했던 사건을 겪은 후 일 공사에게 "혹시라도 변이 일어나면 조선 왕실을 보호해 달라 "면서 일관파천을 요구했고, 1894년 청일전쟁의 전운이 감돌자 이번에는 미국 공사관에 피신을 요청하는 미관파천을 추진했습니다. 민비 시해 후에는 아관파천에 성공했습니다.

러일전쟁의 전운이 감돌자 고종은 이번에는 서울의 영국 영사관으로 피신하여 자신을 보호해 달라고 영국에 요청했습니다. 영관파천을 요청한 것입니다. 하지만 영국은 고종의 요구를 거절했습니다. 도대체 한 나라의 국왕이 국가의 안위는 내팽개쳐 놓고 자기만 살자고 일관파천, 미관파천, 아관파천, 영관파천을 시도한 사실을 보면 "이 사람 과연 국왕 맞나?" 하는 회의감이 엄습합니다.

일본 수상 이토 히로부미는 1895년 주일 영국 공사 어니스 트 샤토우와의 대담에서 "조선의 독립은 현실성이 없으며, 조선은 주변의 가장 강력한 국가에 병합하든가 보호 아래 두어야 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해외 외교사절들이 조선을 불신하는 근원은 다름 아닌 고종의 한심한 통치능력 때문이었습니다.

 

고종에 대한 평가

구대열 이화여대 교수는 다모클레스의 칼? - 러일전쟁에 대한 한국의 인식과 대응이라는 논문에서 서양 외교관들은 고충을 통치자로서의 자격이 완전히 결여된 인물로 판단했다고 지적합니다. 한 나라의 황제가 이 지경이었으니 그 아래 주요 대신들은 끝없는 정변에 시달리면서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국가는 어떻게 되든 만든 자신의 안전한을 추구했습니다. 이들 주요 관리들은 친분 있는 외국인들에게 정변이 발생하면 은신처를 요구하는 사례가 빈번했습니다.

구대열 교수는 구한말의 대신들은 대부분 일본, 러시아 등 외세와 연결되어 있어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외세의 이권 쟁탈과 대립의 앞잡이 노릇을 하게 되었다고 지적합니다. 영국 총영사 조던 Jatia N Jartan은 "조선 조정은 내각 위기가 끊이지 않아 외국 공관들은  정부 각료가 1주일에 한 번씩 갈렸다는 통고를 접수할 틈도 없을 정도였다"라고 지적한 바 있습니다. 이것이 고종 통치시대의 민낯이었습니다.

요컨대 고종은 망국의 암주화호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근자에 이르서 일부 학자들은 고종을 개명군주로 둔갑시켜 그가 개혁을 열심히 추진하려 했으나 일본의 방해로 좌절되었다는 저서와 논문들을 연이어 내놓고 있습니다. 이런 행위를 일컬어 "손바닥으로 하늘 가리기"라고 하는 아닐까요. 반일 종족주의가 고양되자 '반일'이면 무슨 학설이든 존중되는 세태가 빚어낸 웃지 못할 촌극이 아닐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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