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광주 민주화 운동의 시민 학살자라고 알려져 있는 전두환 대통령이다. 또한 그는 신군부를 이용하여 불법하게 나라의 정권을 찬탈하고독재자로서 대한민국을 좌지우지하며 민주화를 짓밟았다고 이야기한다.
우리는 언론을 통하여 이미 전두환 대통령의 공과중 과에 대하여 많은 사실을 알고 있다. 전두환 대통령이 독재자였기 때문에 할수 있었던 일에 대하여 알아보고자 한다.
1980년 오일쇼크: 전두환 대통령의 탄력적인 대응
경제적 불확실성에 휩싸인 한국은 1980년 글로벌 오일쇼크로 결정적인 순간을 맞이했다. 이란의 이슬람 혁명으로 석유를 무기화 하면서 세계가 치솟는 유가와 경제 혼란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특히 한국은 중공업을 기반으로 경제를 성장시키고 있었던 때라 석유제품 수출 타격이 컸다. 세계적으로 경제불황으로 석유화학 생산제품의 세계적 구매력이 급격이 떨어지면서 한국의 수출길이 막혔다. 때문에 중공업 육성을 위한 엄청난 차관은 이자도 갑지 못할 위기에 직면했다. 자칫 국가가 파산 할수 있었던 벼랑끝의 상황이었다.전두환 대통령이 정권을 잡았던 1979년 경상수지는 -6조8천억의 적자를 보고 있었던 상황이었다.또한 그해 여름 냉해가 덥쳐 곡물 수급이 어려워 졌고 국제 곡물가격 급등으로 곡물 수입조차 어려웠다.
미국 연방준비제도 이사회에서 한국의 정치가 불안하고 수출이 불안하다며 각국에 외체를 빌려주는 것에 대하여 조심하라는 경고를 했다.
전두환 대통령은 뚝심하나로 난국을 버텨 나가고 있었지만 한계가는 분명이 이었다. 탈출구를 찾기 위해서는 일본의 도움을 받아야 겠다는 결심을 했다. 당시 일본은 미국에 엄청난 수출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달러를 많이 보유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한국이 일본에게 달러를 빌려달라고 해도 한국에 대해 그다지 우호적이지 않았던 일본은 선듯 달러를 내주지 않았다. 전두환 대통령은 일본에게 우리가 일본대신해서 러시아 북한 공산당을 막아주고 있으니 안보비용으로 100억달라를 내놔라 하고 요청하기로 했다. 1982년 4월 23일 외무부장관 노신영이 주한 일본 대사 스노베 료조를 불러 일본은 향후 5년간 안보비용으로 100억달라를 내라고 요청했다. 일본 본토는 당연히 한국이 미친것 아니냐는 반응이었다. 하지만 전두환 대통령은 일본을 움직일 수는 세력은 미국이라는 것을 이용했다. 미국과의 정상회담을 하는 자리에서 미국 대통령 레이건에 이렇게 요청하였다. 한국은 현재 러시아, 북한 공산당을 막아 주고 있고 때문에 일본이 안전할수 있는 것이다. 한국이 러시아 북한 공산당을 막기 위해 2개 기계화 사단을 운용중인데 기계화 사단 1개 운용 비용이 연간 10억달라 이고 2개 사단을 운용하기 때문에 연간 20억 달라가 소모되고 있다.일본은 대미 수출로 엄청난 양의 달라를 벌어 들이고 있으니 일본이 한국에게 매년 20억달러씩 5년간 100억달러를 지원하게 하라. 그러면 한국은 미국으로 부터 군수 물자와 F-16 전투를 기를 사겠다 라고 레이건 미국 대통령을 설득했다. 레이건 대통령은 전두환 대통령의 제안을 흔쾌히 받아 들여 일본에게 해당 내용을 전달하였다. 하지만 일본은 아무리 미국의 요청이라고 해도 해당 내용은 너무 황당일이라 거절을 했다. 하지만 일본 총선에서 일본 정권 교체가 되었다. 일본은 총리가 되면 미국을 먼저 방문해야 하는데 미국은 한국과 안보 비용 해결을 하지 않으면 미국으로 오지 말라고 일본에게 엄포를 노았다. 당시 일본 총리는 오히려 전두환 대통령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처지가 되었다. 이본은 안보비용 100억 달라는 너무 과하다고 하여 절감을 요청하였고 전두환 대통령은 못이기는 척 40억달로 합의를 보게되었다. 40억달라는 약 4조원 정도 인데 1980년대 4조원은 지금 4조원과 어마어마한 차이가 있다.
대한민국의 반도체 산업과 TDX전자 교환기 개발 정보화 기틀을 마련하다
1983년 일본 나카소네 총리가 한일수교 이후 최초로 방문하였다. 이때 삼성의 이병철 회장은 반도체 사업을 하고 싶었는데 반도체를 제조하기 위해서 장비가 있어야 했다. 그 장비는 일본이 가지고 있었는데 일본이 절대 한국에 수출을 해주지 않고 있었다. 전두환 대통령은 방한 한 일본 총리에게 반도체 제조 장비 수출 승인을 받아 내었다. 우리는 한국의 반도체 산업을 이병철 회장 공으로 알고 있지만 사실 전두환 대통령의 역할이 없었다면 현재의 삼성반도체는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전두환 대통령은 박정희 대통령이 경부고속도를 만들었다면 나는 정보화 고속도를 만들것이라고 선포했다. 전두환 대통령 이전까지만 해도 전화는 교환원이 수동으로 전화를 연결해주는 방식이었다. 전두환 대통령은 특수부대 출신이기 때문에 누구보다 통신망의 중요성을 알고 있었다. 전두환 대통령은 전국민에게 전화기 한대씩 보급을 하기를 원했고 늘어나는 전화를 보급율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인력이 아닌 전자식 교환기가 필요했다. 이에 한국의 과학자들이 TDX 전자 교환기를 개발하게되었고 1980년대 이후 한국에 전화기가 급속히 전파되기 시작하였다. 해당 전자 교환기 덕분에 현재 인터넷 강국이 되는 기틀을 마련하게 되었다.
2차 오일 쇼크 극복과 눈부신 경제 성장 물가 안정 독재자의 퇴장
세계적 불황으로 전세계가 마이너스 성장을 할때 한국을 6. 25 이래 최대 경제 성장을 하게 되었다. 1979년 전두환 대통령이 신군부 세력을 이용하여 정권을 찬탈하고 물려 받은 나라의 경제사정은 경상수지 6조 적자였다. 하지만 그가 퇴임하면서 노태우 대통령에게 정권을 물려 줄때 한국의 경상수지는 12조 흑자였다.
세계적으로 독재자는 자신의 인기를 위하여 포퓰리즘 정책을 사용한다. 없는 돈을 찍어서 사람들에게 나눠 줌으로서 인기를 유지한다. 또한 유엔등에서 원조를 받으면 다음날 독재자의 스위스 비밀계좌로 입금이된다는 말이 있다. 전두환 대통령은 독재자라고 불린다. 하지만 특이하게도 그는 포퓰리즘 정책이 아니라 정말 인기 없는 정책을 실행한다. 그것은 바로 물가 안정정책이다. 자신은 7년 대통령을 하고 물러나기 때문에 인기가 없어도 괜찮다고 했다. 그래서 7년 내내 물가 인상율은 2%이내로 유지 하여 기업 공무원 등 모든 월급이 동결되었다. 당연히 공무원과 기업인들은 불만이 높았다. 하지만 물가 유지 정책 때문에 한국의 경제는 안정화를 이루게 되었다. 전두환이 독재자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된다.
나라의 외채를 완전히 청산하고 순채무국으로 전환 되면서 전두환은 전국민 의료보험 적용 및 취약계층 복지를 실행하기 시작했다. 역시 독재자로서의 포퓰리즘 정책을 시작한것이다. 또한 스포츠 도입 교복 자율화 통행금지 해제 해외여행 자율화 등등 여러 포퓰리즘 정책을 시해함으로서 자유를 국민들에게 주었다.
그는 7년 대통령 이후 퇴임을 약속했는데 독재자라면 공허한 약속일 뿐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전두환 대통령은 7년 임기가 끝나고 선거제도를 바꾸었으며 정권을 후임 대통령에게 물려주었다. 후임 대통령이 친구 노태우 대통령이라 찜찜하지만 선거 방식도 민주적으로 바뀌고 약속도 지켰다.
다른 국가와의 비교 분석
비교 분석을 통해 오일쇼크에 대한 한국의 대응의 독특한 측면이 드러난다. 피해를 입은 다른 국가들과 대조하면 한국이 위기를 성공적으로 극복하는 데 기여한 요인이 강조됩니다.
미래 대비
1980년 오일쇼크 이후 한국은 유사한 경제적 어려움에 적극적으로 대비해 왔다. 이제 회복력을 보장하고 외부 충격에 대한 국가의 취약성을 줄이기 위한 강력한 정책이 시행되고 있습니다.
결론
결론적으로, 1980년 오일쇼크 당시 전두환 대통령의 리더십은 한국의 회복력을 입증하는 증거이다. 과감한 경제 개혁은 도전과 비판에도 불구하고 지속적인 성장과 세계적 인정을 위한 길을 열었습니다. 만약 전두환이 정권을 찬탈하지 않고 그당시 민주화를 부르짓던 대통령이 되고자 했던 3김중 한명이 당선 되었다면 어떡게 되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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