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국의 주요 원인은 외교의 실패
중국 상하이에서 발간되는 일간신문 신보는 1910년 9월 1일, "아아, 한국이 멸망했다"라는 기사를 게재했습니다. 러일전쟁을 미화한 '전 운여록'을 쓴 일본 단가의 거장 이시카와 다쿠보쿠티는 9월 9일 "지도 위 조선국에 검게 먹을 칠하며 추풍을 듣는다"라는 시를 발표했습니다. 조선은 그렇게 망했습니다.
조선이 멸망한 원인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중에서도 주된 요인을 꼽는다면 고종과 왕비 민비의 외교 실패라고 할 수 있습니다. 스스로 난세를 돌파할 능력이 없는 나라는 줄이라도 잘 서야 생존이 담보되는 법입니다. 이것이 외교 및 동맹의 기본 원칙이죠. 풍미롭게도 고종과 민비는 세계사의 패권 세력(주류세력, 즉 영국)이 아닌 패권에 도전하는 세력(비주류세력, 즉 러시아)과 집요하게 동맹을 맺으려고 시도하다가 대세를 그르쳤습니다.
외교에 관한 한 국왕 고종은 일종의 허수아비였고, 왕비인 민비가 1884년 중반부터 대외 문제를 좌우하다시피 한 것이 숨길 수 없는 역사적 사실입니다. 열강과의 외교 관계는 국왕인 고종이 나서서 추진했지만, 실상은 민비의 의중이 조선 정부를 대표하는 입장이었던 것이죠.
총명한 지성 민비의 외교
민비를 접견했던 서양 여성들은 민비가 총명한 여성이었다, 훌륭한 지성의 소유자다, 또는 유능한 외교관으로 조선의 외교를 주도했다는 평을 남겼습니다. 그렇다면 그렇게 충명 하고, 훌륭한 지성의 소유자였던 민비가 왜 그렇게, 거의 병적일 정도로 세계의 주류세력인 패권국이 아니라 비주류세력의 편에 서는 모험을 지속적으로 추진했을까요? 이것은 일종의 미스터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1880년대에 러시아가 남진을 개시하자 한반도를 둘러싸고 영국을 대신하여 일본이 러시아와 대립하는 구도가 격렬하게 전개됩니 다. 이 긴박한 대립에서 고종과 민비는 러시아와의 수고, 제1차 조러 밀약, 제2차 조러 밀약을 추진하다가 종주국 청에 의해 국왕에서 폐위될 뻔한 위기에까지 몰리기도 했습니다.
일본은 청일전쟁이라는 국운을 건 전쟁까지 치러가며 가까스로 한반도의 지배권을 확보했습니다. 그런데 청일전쟁이 끝난 후 러시 아의 말 한마디에 일본이 꼼짝 못 하고 랴오둥해야 반도를 반환하는 모습을 지켜본 민비는 또다시 러시아를 끌어들여 일본을 내치는 인아거일 정책을 추진하였습니다.
일본이 민비를 시해한 이유는?
외세는 민비와 대원군의 갈등을 이용했습니다. 민비가 러시아를 끌어들여 청과 일본을 배척하려 할 때마다 청과 일본은 대원군을 앞 세워 민비를 견제하려 했습니다. 이것이 대원군과 민비가 대결한 큰 줄기였습니다. 대원군과 민비의 대결은 시아버지와 며느리의 대결, 즉 정치의 주도권을 누가 쥘 것이냐의 싸움이 아니라 청, 일과 민비의 대결로 봐야 그 진정한 의미가 이해됩니다. 고종과 민비는 러시아를 끌어들여 청의 압제에서 벗어나려 했고, 삼국간섭으로 일본이 러시아에 굴복하는 모습을 보고는 러시아를 끌어들여 일본을 견제하는 선봉에 섰습니다.
이렇게 되자 미우라 고로! 주조선 일본 공사가 일본군, 영사관 경찰, 칼잡이 낭인들을 동원하여 민비 시해라는 극단적인 선택을 합니다. 한마디로 민비 시해는 술 취한 낭인들의 우발적인 살인 사전이 아니라, 한반도 지배권을 다투던 일본과 러시아의 국익이 걸린 승부였습니다. 그것은 한반도 지배를 둘러싸고 러시아와 일본이 각축을 벌이는 와중에 서로가 전면전을 벌일 수 없는 형편에서 일본이 러시아와 조선왕조의 연결고리인 민비를 제거한 조치였습니다. 일본이 민비 시해로 도전해 오자 러시아는 얼마 후 국왕 고종을 러시아 공사관으로 탈출시키는 아관파천으로 응전하였습니다.
일본 지도부는 조선의 국왕 고종을 민비의 손바닥에서 놀아나는 손오공 정도로 혹평했습니다. 미우라 공사의 회고록에 의하면 민비가 여성으로서는 드물게 재능을 갖춘 호걸과 같은 인물"이라면 서 "사실상의 조선 국왕은 민비"라고 평하고 있었으니까요.
미우라 공사의 회고록과 민비
그의 회고록에 의하면 미우라 공사가 가끔 입궐해서 보면 조선의 궁중 법도에 의해 여성이 남자를 만날 수 없게 되어 있어 민비를 만 날 기회가 없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국왕 고종을 알현하여 대화를 나눌 때 국왕의 의자 뒤에서 무슨 말소리가 소곤소곤 들리는데, 잘 들어 보면 그것은 왕비의 목소리였다는 것입니다. 왕비는 국왕의 자 뒤에 발을 치고 그 안에서 외국 공사와 대화 내용을 듣고 있다가 국왕에게 무언가 지시를 했고, 고종은 그 말을 듣고 외국 공사에게 답변을 한 것입니다. 이런 상황을 접한 미우라는 사실상의 조선 국왕이 왕비라고 주장한 것입니다. 국왕 고종이 민비의 지시를 받으며 외국 공사와 대화를 나누는 장편은 「고충실」을 비롯한 우리 역사 기록에는 전혀 등장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미우라 전임 공사였던 이노우에 가오루부의 알현 장면에서도 확인됩니다. 이노우에 공사는 고종을 면담할 때 늘 내알현 재화, 즉 신하를 배제하고 구약과 직접 대화했고, 알현 시간 은 5시간 이상에 달하기도 했습니다. 이노우에의 고중 알현기에 의하면 그가 고종을 알현할 때면 언제나 국왕이 앉은 뒤나 옆에 발이 내려져 있고 그 안쪽에 민비가 앉아 있었답니다. 민비가 두 사람의 대화 내용을 듣고 있다가 국왕에게 주의를 주거나 조언을 하는 소리가 소곤소곤 들렸다고 합니다. 그러다 대화가 잘 안 되면 발을두세치 열어 얼굴을 절반 정도 내밀고 조언을 했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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