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삼 대통령의 느닷없는 결정
김영삼 정부는 1993년 출범하자마자 느닷없이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던 건물을 '구 조선총독부 청사'라면서 '일제의 만행'으로 몰고 갔습니다. 하지만 그 건물은 먼 옛날 조선총독부로 사용되다가, 해방 후에는 대한민국 제헌국회가 출범한 현장이었고, 대한민국이 건국된 역사의 현장이었습니다. 그리고 1 공화국에서 3 공화국까지 중앙청 건물로 사용되어 왔던 유서 깊은 건물이었습니다.
하루아침에 중앙청에서 '구 조선충독부 청사'로 몰린 이 건물의 철거를 지시한 사람은 김영삼 대통령이었습니다. 김영삼 씨는 대통령 취임식에서 "어느 동맹국도 민족보다 더 나을 수는 없다. 어떤 이념이나 어떤 사상도 민족보다 더 큰 행복을 가져다주지 못한다"고 선언하면서 '민족' 우선의 정치를 선언했고, 취임 직후부터 범국가적으로 반일 감정을 증폭시켰습니다.
‘민족' 광풍이 쓰나미처럼 사회를 덮치고 있던 1993년 8월 9일, 김영삼 대통령은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던 건물을 구 조선총독부 건물'이라면서 민족문화의 정수인 문화재를 옛 조선충 독부 건물에 보존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조선충독부 건물을 해체하고 국립중앙박물관을 새로 지으라"라고 지시했습니다.
'조선총독부 청사'로 낙인찍힌 문제의 건물은 전두환 정부 당시수백억의 예산이 투입되어 대대적인 개보수 공사를 하여 국립중앙 박물관으로 기능한 지 7~8년 정도밖에 안 된, 새 건물이나 다름없었습니다. 그런데 멀쩡하게 국립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는 건물을 광복 50주년에 맞춰 철거하라고 대통령이 명령을 내리면서 당장 난리가 났습니다.
새 박물관이 마련되지도 않은 상황에서 철거가 결정되면서 국보와 보물들을 보관할 임시 박물관이 필요하게 된 것이죠. 문화부는 부라 부랴 국립박물관 경내에 있던 식당 건물을 임시 박물관으로 급조하여 유물을 임시로 옮겨 놓은 다음, 광복 50주년을 맞아 해체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리고 용산의 가족공원 내에 새 박물관을 짓기로 했습니다.
민족정기 회복 사업 대대적으로 벌여
총독부 건물 철거 시점은 광복 50주년인 1995년 8월 15일로 정해졌습니다. 김영삼 정부는 광복 50주년을 맞아 '민족정기' 바람을 대대적으로 일으켰죠. 민족정기 회복을 위해서라는 명분을 앞세워 내무부는 일본이 박았다는 쇠말뚝 제거 사업과 일제가 개악했다는 고유 지명 찾기 사업을 벌였습니다.
교육부는 황국신민 양성을 목적으로 했다는 '국민학교' 명칭을 초등학교'로 바꾸었고, 남산 제 모습 찾기 사업을 위해 남산의 외국인 아파트 폭파 장면을 공영방송이 전국에 생중계했습니다. 상하이 임정원 요인 유해를 봉환했고, 공산주의 계열 독립운동가도 국가 유공자로 지정했습니다. 이 와중에 '역사 바로 세우기'라는 슬로건 까지 등장했는데 누가, 어떤 역사를, 어떻게 바로 세웠는지 기억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전부터 조선총독부 건물 철거를 선동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총독부 건물 철거 사업에도 쇠말뚝 제거와 마찬가지로 풍수가들이 배후에 자리 잡고 있다는 사실이 곳곳에서 확인됐습니다. 풍수연구가로 활동한 최창조 전 서울대 교수는 「경향신문」 1993년 7월 11일 자에 의미심장한 칼럼을 기고했습니다.
내용을 보면 “북악은 서울의 주산인데 그 출중한 기맥이 뻗어 내려 경복궁 근정전에서 그 혈장을 펼치고, 그로부터 온 나라에 백두산의 정기를 나누어 준다는 것이 전통 지리가들의 생각이다.
그런데 왜인들이 국토를 강점한 후 북악의 정기가 경복궁으로 이어 지는 자리에 그들 두령인 조선총독의 숙소를 만들어 기맥의 목줄을 죄고, 국기제의 출발점인 경복궁 남쪽에 중앙청을 지어 목을 조이고 입을 틀어막은 꼴이 되었다. 당연히 두 건물을 철거하고 원상 복구하는 것이 풍수의 정도라고 주장했습니다.
이러한 풍수가들의 주장이 총독부 건물 철거 논리를 폭발시키는 결정적 단서가 되었습니다. 풍수가들의 주장이 사실인지 아닌지 여부를 가릴 수 있는 과학적이고 객관적인 증거가 있을 리가 없죠. 게다가 그런 주장을 하는 풍수가들의 논리에 의문이 제기됩니다. 과연 조선총독부 건물을 철거한다고 해서 억눌려 있던 민족정기가 되살아날 수 있을까요? 그깟 건물 하나, 산의 쇠말뚝 몇 개에 질식사할 만큼 이 민족의 민족정기는 허약하기 짝이 없는 것일까요?
민족정기는 민족 내부의 결집된 힘, 즉 국력이 바탕 되지 않으면 공염불이 되고 맙니다. 우리가 일본에 나라를 빼앗긴 것이 민족정기 부족 때문으로 믿는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국력이 약해서" 당했던 불행한 과거를 '민족정기'를 앞세워 건물을 때려 부숨으로써 건물에 감정투사한 것이나 다름없지 않습니까?
총독부 청사에서 중앙청으로!
일본이 조선충독부 청사로 사용했던 건물은 프러시아의 건축가 게오르크 데 랄란데 ceog de latute라는 사람이 설계를 담당했습니다.
이 사람이 설계를 다 마치지 못한 상태에서 사망하자 대만총독부 설계자였던 일본인 건축가 노무라 이치로와 조선충독부 건축 기사 구니에다 히로시하차, 조선인 건축기사 박길음 등이 뒤를 이어 설계를 완성했습니다.
신축 청사 준공식은 1926년 10월 1일 거행되었습니다. 8년으로 잡았던 건설공기는 제1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10년으로 늘어났고, 공사비도 예상보다 두 배나 많이 들었습니다. 완성된 건물은 당시 일본 본토와 식민지를 포함한 동양 최대의 근대식 건축물이었습니다. 영국의 인도충독부나 네덜란드의 보루네오 충독부를 능가하는 웅장한 규모였다고 알려졌습니다.
조선충독부가 우리 땅에서 물러난 것은 1945년 9월 9일이었습니다. 이날부터 '구 충독부 건물'은 대한민국 근현대사에서 대단히 중요한 역사적 현장으로 존재하게 됩니다. 1945년 9월 9일 충독부 청사 제1회의실에서 미 제24군 군단장 존 하지 중장이 제9대 조선 총독 아베 노부유키에게 항복 문서를 받았습니다.
서울에 진주한 미군은 조선총독부 청사를 미 군정청 청사로 사용했습니다. 당시 미군은 이 건물을 캐피털 홀 이라고 명명했는데, 정인보라는 분이 이를 중앙청으로 번역하여 그 명칭을 계속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1948년 5월 31일 청사 중앙홀에서 제헌국회가 개원하였습니다. 7월 17일에는 건국헌법 공포식이 이 건물에서 거행되었죠. 뒤를 이어 7월 24일 대한민국 초대 정, 부통령 취임식, 8월 15일 청사 앞뜰에서 대한민국 정부수립 선포식 등이 거행된 생생한 현대사의 현장입니다. 국회는 1950년 10월 7일까지 이 건물을 국회의사당으로 사용하다가 태평로 서울시의회 자리로 옮겨갔습니다.
그 후 중앙청은 이승만 대통령의 집무실, 6•25전쟁 때는 조선인민군 청사로 사용됐습니다. 유엔군의 인천상륙으로 인민군이 퇴각하면서 불을 질러 내부가 다 불에 타고 파괴가 되었습니다. 1962년 11월 22일, 전쟁으로 파괴되었던 청사를 복구하여 중앙청 본청 개정식을 거행했습니다. 그 후 3 공화국에서 5 공화국 시절엔 정부청사 등으로 사용되었습니다. 1968년 서양식 정문을 철거하고 광화문을 옛 자리에 복원했고, 1986년 8월 21일에 청사의 개보수 작업을 거처 국립중앙박물관으로 개관했습니다.
김영삼 대통령이 민족정기 회복을 위해 구 조선총독부 건물을 철거한다고 주장했지만, 그들의 진짜 의도는 다른 곳에 있었습니다. "민족사의 잘못된 줄기를 바로잡기 위해서"가 김영삼과 그를 따르는 '문민정부' 무리들의 진정한 의도였던 것입니다. 그 증거를 김영삼 대통령의 고문수석비서관 김정남이 실토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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