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용복 사건
18세기 이후 여러 지도에서 우산도의 위치가 울릉도의 서쪽에서 남쪽으로, 그리고 동쪽으로, 나아가 북동쪽으로 떠돈 것과 관련해서는 17세기말의 안용복가 사건을 고려할 필요가 있습니다. 앞서 지적한 대로 조선왕조는 1417년 이래 울릉도를 비웠습니다. 17세기가 되면 일본 어민들이 이 섬을 죽도라고 부르면서 해마다 정기적으로 찾아와 고기도 잡고 나무도 벌채하였습니다. 이윽고 그들은 울릉도를 일본의 영토로 간주하기 시작했습니다. 1693년 동래 부부의 안용복이 일행과 함께 울릉도에 고기를 잡으러 갔다가 일본 어민들과 충돌하였습니다. 사료에 따라 다릅니다만, 안용복은 일본 어민에게 잡혀서인지 아니면 그들을 따라서인지 일본으로 가서 울릉도가 조선의 영토임을 주장합니다. 그리고선 대마도를 거쳐 동래부로 돌아옵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조선 정부와 일본 막부 간의 외교적 교섭이 벌어집니다. 일본은 울릉도가 조선의 영토임을 인정하고 일본 어민이 울릉도로 건너가는 것을 금지합니다.
그런데 그 사실을 알지 못한 안용복은 1696년 다시 울용도를 거처 일본으로 갑니다. 그리고선 울릉도 뿐 아니라 일본인이 송도라고 부르는 섬, 다름 아니라 오늘날의 독도도 조선의 영토라고 주 장합니다. 안용복은 그 근거로 그가 소지한 강원도 지도를 제시합 니다. 앞서 소개한 우산도와 울릉도를 그린 지도의 한 종류였다고 여겨집니다. 당시는 독도라는 이름은 없었습니다. 안용복은 일본인 이 송도라 부르는 그 섬을 보고, 그가 지도에서 익숙하게 보아온 우산도라고 간주한 것입니다.
안용복의 추방
그런데 일본은 안용복을 상대하지 않고 조선으로 추방했습니다. 강원도 양양으로 돌아온 안용복은 한성으로 압송되어 감옥에 갇힙니다. 사헌부는 함부로 월경한 죄가 크니 사형에 처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영의정이 나서서 일본이 울릉도 항해 금지 조치를 내리게 한 공로가 있다고 변호하여 안용복은 유배형에 처해졌습니다.
요컨대 안용복은 스스로 우산도를 목도했다고 믿은 한국사 최초의 유일한 사람이었습니다. 일본 어민이 그 섬을 송도라 부르면서 자기네 영토로 간주하는 것을 보고, "아니야, 그건 우리의 우산도 야"라고 주장한 것입니다. 오늘날의 독도였습니다. 그런데 조선 정부는 안용복의 그런 주장에 하등의 관심을 표하지 않았습니다. "그래, 우산도를 발견했어? 그것 어디 있는 거야? 그런 식으로 관심을 표한 다음, 관리를 파견하여 섬을 탐사하지 않았습니다. 조선왕조는 울릉도에만 관심이 있었지 우산도에는 하등의 관심을 표하지 않았습니다.
1699년 이후 조선왕조는 3년마다 관리를 울릉도에 파견해 혹 일본 어민이 와 있는지를 감찰하였습니다. 이후 여러 지도에서 울진현과 울릉도 사이에 그려진 우산도가 사라졌습니다. 그사이에 아무런 섬이 없다는 것이 저절로 명백해졌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우산도란 섬에 대한 환상은 없어지지 않았습니다. 18세기 이후 우산도가 울릉도 남으로 나아가 동으로 떠돈 것은 그러한 이유에서였습니다.
우산도의 종착지
1881년 일본인이 울릉도를 불법 침입했습니다. 이를 계기로 1882년 고종은 이규원을 감찰사로 파견하여 울릉도를 자세히 탐사하게 했습니다. 1883년부터는 울릉도에 사람을 들여보내 살게 했습니다. 무려 466년 만의 일이었습니다. 이규원을 파견하면서 고종은 "울릉도 근방에 송도, 죽도, 우산도가 있다는데, 거리가 얼마인지를 조사하라"라고 명합니다. 그러면서 또 말하기를 "송도, 죽도, 우산도 모두를 합쳐 울릉도라고도 하니 자세히 살피라" 고도합니다. 이로부터 1882년까지도 조선왕조의 울릉도에 대한 이해는 혼란을 면치 못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나중에 울릉도에서 돌아온 이규원은 우산도를 찾지 못했다고 보고했습니다. 당시 그가 세밀하게 그린 울릉도 지도에는 죽도라는 부속 섬은 있어도 우산도는 없었습니다. 다시 말해 이규원은 동남 87킬로미터 바다에 놓인 바위섬을 알지 못했거나, 알았더라도 그것을 울릉도의 부속으로 간주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우산도에 대한 환상은 없어지지 않았습니다. 1899년 대한제국의 학부가 대한전도라는 지도를 제작하였습니다. 우산도는 울릉도 동북에 붙은 조그만 섬으로 그려져 있습니다. 17년 전 이규원이 죽도라고 한 바로 그 섬이었습니다. 오늘날에도 죽도라 불리는 그 섬입니다. 앞서 소개한 대로 18세기 이래 여러 지도에서 우산도의 위치가 울릉도의 동북으로 옮겨가고 있었습니다. 거기에 어떤 조그만 섬이 실재한다는 정보가 영향을 미쳤다고 보입니다. 그 섬이 언제부터 죽도로 불렸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1899년 학부는 대한전도를 제작하면서 그 섬을 우산도로 간주하였습니다. 17년 전 이규원의 우산도를 찾지 못했다는 보고는 큰 영향을 미치지 못했습니다. 그만큼 오래 이어져 온 우산도에 대한 환상은 쉽게 없어지지 않았던 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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