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상 판명
1883년에 개방된 이래 울릉도의 인구는 1900년까지 1,000명으로 증가하였습니다. 일본인도 많이 살았는데, 주로 강치잡이를 위해 서였습니다. 이에 1900년 대한제국은 칙령 41호를 내려 울릉도를 군으로 승격하고 군수를 파견하였습니다. 그때 군의 영역을 정하기를 “울릉 전도와 죽도와 석도해를 관할한다"라고 했습니다. 죽도는 오늘날의 죽도 그것입니다. 문제는 석도입니다. 그것을 두고 오늘날의 한국 정부나 학자들은 독도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한국이 독도 고유영토설을 주장할 때 또 하나의 강력한 근거로 제시되는 것이 바로 이 석도=독도설이라 하겠습니다. 과연 그러합니까?
그보다 앞서 이 칙령 41호에 의해 우산도가 그 종적을 감추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후 우산은 어느 자료에도 나타나지 않습니다. 15세기 초 울릉도를 비우면서 생겨난 우산도가 이리저리 떠돌다가 결국 소멸한 것입니다. 그 1년 전의 대한전도에 까지 이어져 온 섬이었습니다. 그 유서 깊은 섬을 대한제국이 더 이상 언급하지 않게 된 것은 그것이 환상의 섬임을 이윽고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그 외에 달리 해석할 방도가 있을까요. 대한제국의 칙령 41호는 우산도는 환상의 섬이라고 공포한 것과 다를 바 없다고
생각합니다.
대한제국은 새로운 행정구역을 선포하면서 울릉도와 부속 도서를 조사했을 겁니다. 그 결과 죽도와 석도를 군역으로 지정하였습니다. 죽도는 오늘날의 죽도 그대로입니다. 죽도 이외에 오늘날 울릉도에 부속한 섬을 찾으면 관음도입니다. 그 외에는 사람이 사는 섬이 없습니다. 그래서 칙령 41호의 석도는 오늘날의 관음도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한국 정부나 학자들은 석도가 독도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일종의 자가당착이라고 생각합니다.
독도 고유영토설에 의하면 독도는 오래전부터 우산으로 불려 왔습니다. 그 우산이 1899년과 1900년 사이에 갑자기 석도로 이름을 바꾸었다는 겁니다. 저는 이러한 주장을 도무지 납득할 수 없습니 다. 앞서 제시한 대로 우산은 여러 지도에서 떠도는 섬이었습니다.
1882년에는 우산을 찾으라는 왕명까지 내려졌습니다. 그래도 못 찾았습니다. 드디어 1900년 대한제국은 그 우산을 포기하였습니 다. 다시 말해 대한제국은 1900년까지 독도를 몰랐습니다. 그런데 그해에 새롭게 나타난 석도가 독도라니요. 그렇다면 우산은 왜 버렸습니까. 그래서 자가당착이라 한 것입니다.
석도의 실체
한국 정부와 학자들이 석도가 오늘날의 독도라고 주장하는 논리는 다음과 같습니다. "석도제의 석은 돌을 의미하므로, 석도를 우의 음으로 읽으면 '돌섬'이 된다. 그런데 경상도나 전라도의 방언에 서 돌'은 '독'이라고도 한다. 그래서 석도를 경상도와 전라도 방언으로 읽으면 '독성'이다. 그 '독섬'을 홀로 독이란 한자와 섬도란 한자를 빌려 표기하니 곧 독도이다. 이 주장 역시 심한 자가당착입니다. 너무 궁색한 논리의 중첩이 라 참담하기까지 합니다. 객관적으로 보아 독도는 돌섬이라기도 보 다 바위섬입니다. 돌과 바위는 다릅니다. 그러니까 석도는 처음부 터 독도와 무관한 섬이었습니다. 그리고 특정 음을 표기하기 위해 글자를 빌리는 차자 현상은 어떤 뜻을 정확히 대변할 글자가 없을 때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우리 한국사는 오랜 한자 문명권입니다. 돌섬이란 뜻을 한자로 표현할 때 '석도'로 표현하기는 조금도 어렵지 않습니다. 돌섬은 경상도와 전라도에서도 한자로 표기될 때 어김없이 석도였습니다. 그 정도야 한자를 얼마라도 아는 유식자 라면 조금도 어렵지 않은 문자생활이었습니다. 굳이 확실치도 않은 방언을 빙자하여 '돌섬'을 '독섬'으로 바꾼 다음 '홀로 독'이란 엉뚱한 한자를 빌려 표기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돌섬, 곧 석도가 독도와 무관함을 증명할 한 장의 지도를 제시하겠습니다. 1911년 미국 로스앤젤레스의 교민들이 출간한 이승만의 「독립정신」이란 책에 실려 있는 '조선지도'입니다. 전국의 지명이 한글로 표시되어 있습니다. 미국 교민들의 조국 조선에 대한 그리 움이 담겨 있는 지도라고 하겠습니다. 울릉도 바로 남쪽에 '돌도'가 붙어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이 '돌도'가 곧 석도입니다. 다만 울릉도 동북에 있어야 할 섬을 남에다 그린 것은 착오라고 하겠습니다. 어쨌든 칙령 41호 중의 석도가 동남 87킬로미터 해상의 독도가 아님은 이 지도의 발전으로 더없이 명확해졌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왜 지금까지 수많은 독도 연구자들이 이 지도에 주목하지 않았는지를 의아스럽게 생각합니다.
일본의 독도 편입
1883년부터 울릉도에 살기 시작한 조선인들은 멀리 동남 해상으로 어로를 나가면서 거기에 홀로 있는 섬을 가리켜 '독도체로 부르고 쓰기 시작했다고 짐작됩니다. 독도를 울릉도의 부속 도서로 간주하는 주민의 공동 인식도 자연스럽게 생겨났다고 보입니다. 그렇지만 대한제국의 중앙정부가 독도를 객관적으로 인지하거나 관리를 보내 탐사한 적은 없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국토의 사방 경계를 명확히 할 목적에서 전국을 과학적으로 측량하고 지도를 그릴필요가 있었는데, 솔직히 말해 대한제국의 역량과 수준을 넘는 일이었습니다. 그 결과 1900년 울릉 군역을 획정할 때 독도는 제외되고 말았습니다.
주지하듯이 1904년 일본은 독도를 자국의 영토에 편입하였습니다. 어떤 계기로 독도의 내력을 조사한 다음, 그것이 조선왕조에 소속한 적이 없음을 확인하고서였습니다. 2년 뒤 1906년 그 사실을 우연히 알게 된 울릉군수가 "본군 소속의 독도가 일본으로 편입되었습니다"라고 보고합니다만, 중앙정부는 그에 대해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미 일본에 외교권을 뺏긴 보호국이라서 그러했다는 변명은 곤란합니다. 제3국과 외교를 할 권리를 빼앗겼을 뿐이지 자신의 국토와 인민에 대한 지배권은 살아 있는 독자의 국가였습니다. 대한제국이 일본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은 것은 독도에 대한 인식이 없는 가운데 일본의 행위를 그리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바로 여기가 국가 간 영토 분쟁의 '결정적 시점(criticalpoint)이라고 합니다. 일본이 독도를 자국의 영토로 편입할 때 그것을 인지한 대한제국은 분쟁을 제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로 인해 오늘날 한국 정부가 독도 문제를 국제사법재판소로 가져가자는 일본 정부의 주장을 받아들일 수 없는 처지임은 모두가 잘 아는 사실입니다. 솔직히 말해 한국 정부가 독도가 역사적으로 그의 고유한 영토임을 증명하기 위해 국제사회에 제시할 증거는 하나도 존재하지 않은 실정입니다. 독자 여러분은 불쾌하게 들릴지 모르겠습니다만, 국제사 법재판소의 공평무사한 법관들은 그렇게 판단할 것입니다. 저는 한 사람의 지식인으로서 그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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