쌀의 '수탈' 인가 '수출' 인가?
일제의 식민지 지배에 대한 비판 중에서 가장 많이 듣는 얘기 중의 하나가, 일제가 조선을 식량 공급기지로 만들어 조선의 쌀을 수탈해 갔다는 것입니다.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에서도, 교과서에 따 라 차이가 있지만, 일본으로 쌀을 '수탈'해 갔다고 표현하거나 그냥 일본으로 '가져갔다.' 또는 반출했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가져갔다'거나 '반출했다는 표현은 '수탈에 비해서는 강제성을 배제한 듯이 보이지만, 그 대가를 지불한 것인가의 여부를 의도적으로 숨기고 있다는 점에서 큰 차이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쌀을 대량으로'수탈' 또는 '반출'한 결과, 조선인의 쌀 소비량은 그게 줄었고, 잡곡으로연명해야 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조선인은 쌀을 증산해도 그 혜택을 보지 못했고, 생활수준은 단역히 떨어지지 않을 수 없는 것이 됩니다. 이러한 교과서의 서술, 또는 그 영향을 받아 형성된 한국인의 통념은 과연 사실에 입각한 것일까요? 조선의 쌀을 일제가 '수탈' 한 것 일까요, 아니면 조선이 일본으로 쌀을 '수출'한 것일까요? 만약 '수탈'이 아니라 '수출'한 것이라면, 그로 인해 조선인이 더 못살게 되었다는 식의 논리는 성립하기 어렵게 됩니다. 그러면 해방 전 조선의 소작 농민들의 궁핍한 생활은 어떻게 설명되어야 할까요? 여기서는 이상의 점들을 하나하나 검토해 보겠습니다.
쌀의 생산과 수출 그리고 인구증가
수시로 신문에서 다루고 있습니다. 특히 쌀값 동향은 농민은 물론 곡물상이나 쌀을 소비하는 도시민의 주된 관심사였기 때문에, 전국 각지의 쌀 시세가 주식 시세와 함께 신문에 거의 매일 보도되고 있었습니다.
당시의 자료나 신문을 조금이라도 읽어 본 사람이라면, 쌀은 통상의 거래를 통해 일본으로 수출된 것임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교과서의 서술이 상정하고 있는 것처럼 만약 누군가가 피땀 흘려 생산한 쌀을 강제로 빼앗아 갔다고 한다면, 바보가 아니고서야 가만히 참고 있을 농민도 없겠거니와 그것이 곧 신문에 보도될뉴스 거리가 되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쌀의 생산량은 당초1000만 석정도의 수준에서 기복이 있지만2000만 석이넘는 수준으로 두 배 높아졌습니다. 산미증식 계획을 추진하여 수리시설을 정비하고 비료의 투입을 늘린 결과입 니다. 그런데 쌀의 수출량은 당초 미미한 수준에서 출발하여 1000 만석 가까이 확대되었고, 많을 때에는 생산량의 절반이 수출되고 있었습니다. 이 시기 조선의 쌀은 가장 중요한 수출품이었고, 조선의 농업은 수출산업이 되었다고 할 수 있겠지요. 생산량에서 수출량을 빼고 수입량을 더해서 구한 국내 소비량은 정체되어 있었는데, 그 사이 인구가 늘었기 때문에 1인당 쌀 소비량은 감소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조선과 일본의 쌀 생산으로 인한 갈등
조선의 쌀이 일본으로 많이 수출되면 두 지역의 쌀 시장은 하나 로 묶이게 됩니다. 자연히 조선과 일본의 쌀값은 근접하게 되고 또 긴밀하게 연동할 수밖에 없겠지요. 당초 조선미는 예컨대 돌이 많이 들어가 있는 등 품질 문제 때문에 일본쌀 보다 낮은 가격으로거래되었습니다.그렇지만 쌀의 건조 상태나 가공 방식이 개선되면서 일본의 쌀값에 거의 접근하게 됩니다. 조선 농민의 입장에서 보면, 일본이라는대규모 쌀 수출 시장이 생긴 덕분에 유리한 입장에 있었다고 할 수 있겠지요. 그 반면 일본 농민의 입장에서 보면, 조선미가 대량 유입되면서 일본 내 쌀값이 하락 압력을 받았기 때문에 불만을 갖게 됩니다. 조선에 산미증식계획을 추진한 것은 일본의 쌀 부족을 해소 하기 위한 것인데, 쌀 부족이 계속되었다면 괜찮았겠지만, 그렇지 못한 상황이 되면 조선과 일본 농민들의 이해관계가 충돌하는 경우가생깁니다. 예컨대 1931년에는 두 지역의 쌀농사가 모두 풍작이어서 쌀값이 급락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어떤 갈등이 벌어졌는지 당시 「동아일보」 기사가 잘 보여 줍니다. 당시의 분위기를 생생하게 전달하기 위해 조금 길지만, 이를 인용해 보겠습니다.
조선의 입장에서는 그 방법의 여하를 불문하고 이입을 제한하여 털끝만큼이라도 조선미의 일본 유출을 방해한다면, 이를 절대로 용납할 수 없다. 오늘날에는 일본의 쌀값을 압박하는 최대 원인이 조선미의 일본 유입에 있다는 사정은 조선 농민도 모르는 바 아니다. (동아일보, 1931년 6월 16일 "조선미 이입 제한 엔 절대 반대", 문장을 현대어로 손질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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