쌀은 수탈된 것이 아니라 수출되었다
조선미의 일본 유입이 일본의 쌀값을 압박해 왔다는 점, 그리고 일본 농민이 조선미의 일본 유입을 제한하려는 움직임을 보였고, 그에 대해『동아일보」는 조선 농민의 입장에서 단호히 반대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만약 조선미의 일본 수출이 제한되면, 판매처를 잃은 조선미 가격은 더욱 크게 떨어질 것이고, 조선의 농민이 막대한 손해를 입을 것이 눈에 뻔히 보였기 때문입니다. 이를 거꾸로 보면, 일본이라는 쌀의 대규모 수출 시장이 옆에 있었기 때문에, 조선의 쌀 생산이 크게 늘어났음에도 쌀값은 불리해지지 않았고, 그것이 조선 농민의 소득 증가에 크게 기여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는 당시를 살았던 조선의 농민이나 언론인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던 당연한 상식입니다.
이에 대해 일제가 조선의 쌀을 일본으로 '수탈'하거나 '가져갔다'라고 비판하는 교과서의 논리 대로라고 한다면, 조선 쌀의 일본 수입을 제한하려는 조치를 조선인이라면 대환영해야 맞습니다. 쌀을 더 이상 일본으로 가져가지 못할 테니까요. 그러나 현실은 이것과 정반대였던 것입니다. 이러한 모순에 빠진 것은 당시의 자료를 한 번이라도 읽었다면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조선인의 쌀 소비 감소가 곧 생활수준의 하락을 뜻하는가?
쌀을 빼앗아 간 것이 아니고 자발적으로 거래한 것이라고 한다면
조선인의 쌀 소비가 왜 줄었는지는 다른 논리로 설명할 필요가 있 겠지요. 요즘은 소득이 늘어나도 1인당 쌀 소비가 계속 줄어들고 있지만, 당시에는 매끼 쌀밥을 먹는 것이 부대의 상징이었습니다. 보 통의 농민들은 대부분의 끼니를 조를 비롯한 잡곡으로 때우고 있었습니다. 농민들이 쌀을 생산하고서도 쌀을 제대로 먹기 어려웠던 것은, 쌀을 대량으로 수출하다 보니 귀해져서 가격이 비싸졌기 때 문입니다. 특히 소작농의 경우는 생산한 쌀에서 소작료와 그 외의 불가피한 지출을 충당하고 나면 먹을 식량이 부족하게 됩니다. 그러다 보니 비싼 쌀을 팔아서 값이 싼 잡곡으로 바꾸어 소비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쌀을 수출한 것이 생활수준의 하락을 가져온 원 인은 아닙니다. 비유를 하나 들겠습니다. 요즘 송이버섯은 귀하고 하도 비싸서 보통사람들은 좀처럼 먹기 어렵습니다. 그 이유 중의 하나가 일본으로 대량 수출되기 때문입니다. 일본 사람들의 송이버섯 사랑은 유별나서 일본에서도 가격이 매우 높습니다. 한국의 송이버섯 채취 농가가 생산량을 늘렸다고 해도 더 많이 수출하고 나면, 송이버섯의 한국 내 소비가 줄어들겠지요. 그렇다고 해서 한 국의 생활수준이 떨어졌다고 얘기하지는 않습니다. 송이버섯을 판 대금으로 다른 소비나 저축이 늘었을 테니까요. 송이버섯이 쌀에 비해 훨씬 더 귀하고 비싸겠지만, 두 얘기는 논리상 아무런 차이가 없습니다.
당시 농민들은 왜 그렇게 가난을 벗어나지 못했나?
만약 쌀이 '수탈'된 것이 아니고 '수출한 것이고, 그것이 농민의 소득 증가에 오히려 기여했다고 한다면, 이 시기의 농민 특히 소작농은 왜 그렇게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했을까요?
첫째, 당시 농업 생산성의 수준 자체가 낮았기 때문입니다. 토지 면적당 쌀의 생산량을 비교해 보면, 당시 조선은 일본의 2분의 1 정도에 불과했습니다. 현재의 수준과 비교해 보면 더욱 낮았습니다.
당시는 인구의 절반가량이 농업에 종사해서 쌀을 생산했는데, 그렇게 수확한 쌀이 현재는 그 10분의 1에 불과한 종사자가 수확한 생산량에도 미치지 못했습니다. 농업의 생산성이 낮다는 것은 결국 1 인당 소득이 그만큼 낮다는 것을 뜻합니다.
둘째, 토지 소유가 워낙 집중되어 있어서 소작농의 지위가 특히 열악했습니다. 논의 소작지율이 65~68%로 높았 습니다. 즉 논의 3분의 2 가량이 소작농에 맡겨져 경작되고 있었습니다. 밭의 경우는 그보다 비율이 낮았지만, 이 시기 경작지의 대부분을 소작농이 경작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자신의 토지가 전무한 순소 작농이 1930년대에는 절반을 넘었습니다. 이들 소작농은 지주에게 생산량의 절반 이상을 소작료로 납부해야 했습니다.
이 시기 농촌 인구는 계속 늘어나고 있었기 때문에 경지를 둘러싼 소작인 간의 경쟁이 심할 수밖에 없었고, 지주제가 강고하게 유지되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은 일제시기에 좀 더 악화되기는 했지만, 기본적으로 조선 후기로부터 지속되어 온 것입니다.
전체 농가 중에서 지주의 비중은 3.6%에 불과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소작료 수입을 통해 전체 쌀 생산량의 37%를 취득하고 있었습니다. 자가 소비를 제하고 상품화되는 쌀을 기준으로 하면 지주의 몫은 50% 이상으로 늘어납니다. 앞에서 쌀이 수출 상품이 되어 조선의 농민들이 유리해졌음을 언급했지만, 그 혜택은 쌀 판매량이 많은 지주나 자작농에 집중되었고, 소작농에게 돌아간 것은 미미한 수준에 그칠 수밖에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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