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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일본의 토지조사의 진짜 목적과 신용하의 거짓말

by 스튜디오윤 2023. 10.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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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스톨과 측량기

토지조사사업 당시 일부의 토지에서 소유권 분쟁이 있었습니다.

전국 487만 헥타르 가운데 12만 헥타르에 불과한 국유지를 둘러싼 분쟁이었습니다. 이와 관련해서는 1982년 신용하 교수가 「조선토지조사사업연구」라는 책을 썼습니다. 신용하는 국유지 분쟁에 관해 "한 손에는 피스톨을, 다른 한 손에는 측량기를"이란 말을 지어냈습니다. 지금 이 글의 제목이 거기서 온 것입니다. 이 말의 뜻은 어느 민간인이 총독부를 상대로 해당 토지가 자기 소유라고 주장하면 총독부는 피스톨로 그것을 제압했다는 겁니다. 그렇게 신용하는 토지 조사사업을 피스톨이 발사되는 폭력적 과정으로 묘사하였습니다.

당시 토지조사국의 직원들은 실지조사를 나갈 때 허리에 권총을 찼습니다. 깊은 산중에 들어가면 산짐승의 공격을 받을 위험이 있었습니다. 실제로 그런 사고가 있기도 했습니다. 또한 산중에는 강도가 활동했습니다. 그래서 호신용으로 권총을 찼던 것입니다. 그 권총이 농민을 상대로 발사된 적은 없습니다. 농민들은 오히려 조사반을 환영하였습니다. 처음에는 조사반의 활동을 경계했습니다만, 차츰 그 내용을 알고선 우호적으로 바뀌었습니다. 조사반이 오면 사람들은 자기 토지에서 이름을 쓴 팻말을 들고 대기했습니다.

이장과 이웃 사람이 입회하여 그 사람이 소유자임을 확인해 주었습니다. 토지조사국은 조사를 마친 다음 토지대장의 초본을 공개했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토지와 이름이 토지대장에 적혀 있는 것을 기뻐했습니다. 착오가 있으면 열심히 이의를 제기했습니다. 토지조사에 대한 조선 농민의 반응은 적극적이었습니다. 왜냐하면 토지가 목숨 줄이기 때문입니다.

 

신용하의 거짓말

그런데 왜 신용하라는 학자는 "한 손에는 피스톨을, 다른 한 손에는 측량기를"이라는 엉터리 학설을 만들었나요". 그는 토지조사 사업에 관한 책을 쓰면서 일선 군청이나 법원에 있는 토지대장이나 지적도를 열람한 적이 없습니다. 당시 농민들이 제출한 신고서를 발굴하거나 정리한 적도 없습니다. 각지에서 발생한 국유지 분쟁의 내력과 판결이 어떠했는지 관련 자료를 조사하지 않았습니다. 토지 조사사업에 대해 총독부가 편찬한 각종 월보나 보고서를 세밀하게 읽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그 일부를 자신의 입맛에 맞게 조작하였습니다. 토지조사사업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조선시대 토지제도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런 준비를 전혀 하지 않았습니다. 그 상태에서 신용하는 토지조사사업에 관해 어릴 적부터 가지고 있는 선입견을 학술의 형식으로 포장하였을 뿐입니다. 그런 책에 대해 한국의 학계와 언론계는 환호하였습니다. 일제의 토지 수탈이 구체적으로 증명되었다고 말입니다. 그리고선 신용하에게 영광스러운 학술상을 수여했지요.

저는 앞의 글에서 소설가 조정래를 학살의 광기에 사로잡힌 증오의 소설가라고 비판하였습니다. 그의 소설 「아리랑」은 토지조사사업당시 일개 주재소 경찰이 조선 농민을 즉결 처분하는 장면을 극적으로 연출하였습니다. 그리고 전국적으로 4,000명의 조선인이 그런 식으로 처형되었다고 했습니다. 조정래가 그런 엉터리 역사를 소설로 지어낸 것은 그의 책임만이 아니었습니다. 실은 그 몇 년 전에 신용하라는 한국 사회학계를 대표하는 학자가 "한 손에는 피스톨을, 다 른 한 손에는 측량기를"이라는 엉터리 학설을 펼쳤던 것입니다.

 

일제의 토사조사사업의 진짜 목적

일제의 조선 병합은 몇 조각의 토지를 수탈하기 위한 목적이 아니었습니다. 총면적이 2300만 헥타르가 되는 한반도 전체를 그의 부속 영토로 영구히 지배할 목적의 병합이었습니다. 이 땅에 사는 조선인 전체를 일본인으로 완전 동화시킬 거대 프로젝트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들의 법과 제도를 이 땅에 이식하였던 것입니다.

그 일환으로 전국의 토지가 얼마인지, 토지의 형질이 어떠한지, 소유자가 누구인지를 조사한 것입니다. 그것이 토지조사사업 입니다.

당시 만들어진 토지대장과 지적도는 지금도 나라가 온갖 토지 행정의 기초 자료로 요긴하게 사용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사는 집터의 번지와 주소는 언제 붙여진 것입니까. 다름 아닌 1910 ~1918년의토지조사사업에서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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