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산 체험
한국인이면 누구나 동의하듯이 백두산은 민족의 산입니다. 민족의 발상지로서 거룩한 산입니다. 저는 어릴 적부터 백두산을 영산이라고 배웠습니다. 백두산 꼭대기를 영봉이라고 했습니다. 제가 어릴 때 학교에서 받은 교과서 뒷장에는 "백두산 영봉에 태극기 날리자"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1991년 저는 백두산에 오른 적이 있습니다. 정상에 올라서자마자 눈앞에 펼쳐진 천지에 저는 감동했습니다. 가슴이 심하게 울렁거렸습니다. 청옥 물빛이 너무나 아름다워서만은 아닙니다. 그곳이 민족의 발상지, 거룩한 성소, 신령한 봉우리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날부터 저는 회의하기 시작했습니다. 백두산을 중국은 장백산이라고 부릅니다. 하산하는 길에 장백산 입구에 세워진 내판을 자세히 읽으니 15세기까지도 화산 활동을 했다는 겁니다. 말하자면 아주 오래 전의 백두산 천지 그곳은 화산의 분화구입니다. 용암이 벌겋게 끓어오르는 분화구였습니다. "그런 곳에서 단군이 내려오셨다니, 그것 이상한데"라는 회의였습니다.
그때부터 저는 무슨 자료를 읽다가 백두산 이야기가 나오면 유심히 메모해 두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선 알게 되었습니다. "아, 백두산 민족의 영산으로 된 것은 20세기의 일이구나"라고 말입니다. 그 야기를 지금부터 하겠습니다.
소중화의 상징
조선왕조 1776년의 일입니다. 이조판서와 대제학을 지낸 서명응이 백두산에 올랐습니다. 그는 한동안 백두산 정상의 경관에 취해 있다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아직 이 하늘 아래의 큰 연 못에 이름이 없는 것은 나로 하여금 이름을 짓게 하고자 함이 아닌가.” 그러고선 태일택이라고 이름을 지었습니다. 태는 태극을, 일은 삼라만상은 하나라는 뜻입니다. 서명응은 당대의 최고 성리학자답게 뻥 뚫린 화산의 분화구와 그에 담긴 물을 보고 만물이 태극에서 솟았다는 성리학의 원리를 연상하였습니다.
그보다 조금 앞서 박종이란 함경도 정성의 어느 선비가 백두산에 올랐습니다. 그리고선 말하기를 "곤륜산 아래로는 비록 중국의 산이라도 백두산에 미치지 못한다. 이로써 백두산이 곤륜산의 적장자가 되고 중국의 오악은 단지 그 서자가 될 뿐이다"라고 했습니다. 박종에게 백두산은 천하의 으뜸인 곤륜산의 적장자였습니다. 그의 백두산 인식은 조선은 소중화라는 역사의식과 궤를 같이합니다. 3000년 전 중국에서 건너온 기자가 동방의 문명을 열었습니다. 그래서 소중화입니다. 박종은 뒤이어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백두산이 곤륜산의 적장자여서 땅이 이미 중국의 정통을 계승했으니 하늘이 기자와 같은 성인을 우리나라에 내려 주신 것이 어찌 우연이겠는가." 더 자세히 소개하지 않겠습니다만, 이 같은 백두산 인식은 19세기말까지 면면하게 이어졌습니다. 백두산은 신비롭고 중요한 산이었습니다. 서명응과 박종이 그 높고 험한 산을 오른 것은 그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신비로움과 중요함이 무엇이냐 하면 삼라만상의 근원으로 태극과 같거나 천하 으뜸인 곤륜산의 적장자와 같은 것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성리학적 자연관과 역사관의 상징으로서 신비롭고 중요했던 것입니다. 오늘날의 한국인이 품고 있는 민족의 영산으로의 백두산 이미지는 아직 아니었습니다.
민족의 아버지와 어머니
백두산이 민족의 영산으로 바뀌는 것은 식민지기의 일입니다. 망국노가 되어 일제의 억압과 차별을 받게 된 역사가 그 배경이었습니다. 조선인은 일제하에서 비로소 민족을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기자의 자손이 아니라 단군의 자손이다. 우리는 한 핏줄이 오랜 세월 혈통도 언어도 문화도 함께한 운명의 공동체이다. 그러한 의식이 바로 민족입니다. 조선시대에는 민족이란 말도 없었고 그에 상응하는 의식도 없었습니다. 민족이란 말이 일본에서 건너오고 그에 상응하는 의식도 생겨나니 그에 걸맞은 상징이 필요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떠오른 것이 바로 백두산입니다. 백두산 신화를 만들어 내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사람을 꼽자면 저는 최남선이라고 생각합니다. 1927년 최남선은 백두산을 탐사했습니다. 그리고선 백두산근참기라는 책을 지었습니 다. 책 제목에서 보듯이 최남선에게 백두산은 이미 성지였습니다.
그는 백두산 천지에 올라 울면서 소리쳤습니다.
백두산은 우리 종성의 근본이시며, 우리 문화의 연원이시며, 우리 국토의 초석이시며, 우리 역사의 포대이시다. 삼계를 헤매는 비렁뱅이 아이 가 산 넘고 물 건너 자애로운 어머니의 온화한 얼굴을 한번 뵙기 위해 왔습니다. 한아버지, 한 어머니, 저울시다. 아무것도 없는 저울시다.
그리고선 기도하였습니다. "우리 민족은 다시 살아날 것이다. 믿습니다. 믿습니다. 압시사. 압시사. 백두천왕 천지대신이여" 이렇게 백두산은 최남선에 이르러 민족의 아버지와 어머니로 탈바꿈하였습니다.
그러한 인식의 전환에는 전통문화의 저변을 관통하는 어떤 흐름이 작용하였습니다. 우리 민족은 오래전부터 땅에는 길하거나 흉한 기맥이 흐른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한 국토관은 15~19세기에 걸쳐 점점 강해졌습니다. 각 세기의 지도를 살피면 18~19세기가 될수록 산맥의 지도로 바뀌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어떤 기운이 산맥을 따라 국토를 관통한다는 감각이지요. 그러한 국토 감각은 19까지만 해도 앞서 지적한 대로 성리학적 자연관이나 세계관이 표출되었습니다. 20세기에 들면 그러한 감각은 어떤 유기적 신체로 형상화합니다. 예컨대 한반도는 중국을 향해 포효하는 호랑이 같다는 식입니다. 그런 식으로 그려진 그림이 역사책에 자주 나오는 맹호기상도입니다. 일설에 의하면 최남선의 발상이라 합니다. 그러한 신체 감각에서 호랑이의 날카로운 이빨에 해당하는 곳이 다름 아닌 백두산입니다. 최남선이 백두산에 올라 울고 치고 기도한 것은 바로 그 때문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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