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 광명성의 출현
해방 후 백두산은 남한과 북한에서 공히 민족의 영산으로 받들어졌습니다. 어릴 적부터 저는 백두산 꼭대기를 영봉으로 알았습니 다. 한국인 모두가 그러하였습니다. 누가 억지로 조작한 것은 아닙니다. 백두산 이미지가 정치적 신화로 조작되는 것은 1987년부터입니다.
북한을 먼저 소개하겠습니다. 그해 북한은 백두산 일대에서 항일 전사들의 구호가 새겨진 나무가 발견되었다고 발표하였습니다. 구호의 내용은 "민족의 영수 김일성 장군 만세"처럼 김일성에 대한 찬양이었습니다. 그 아들 김정일이 태어난 날 밤 백두산 천지에 광명성이 솟았음을 증언하는 구호도 있었습니다. 그러한 구호목이 백두산 일대를 넘어 멀리 황해도까지 8만 5,000그루나 발 굴되었다는 겁니다. 구호목은 북한 정부가 김일성 부자를 우상화하기 위해 사람들을 동원하여 나무껍질을 벗기고 그 속살에다 화학약품으로 새긴 것입니다. 어느 탈북자는 저에게 자기 삼촌이 그 일에 동원된 적이 있다고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나아가 김일성은 백두산 꼭대기 어느 지점에 통나무집을 짓고 여기가 항일 빨치산의 밀영이라고 소리쳤습니다. 아들 김정일이 태어 난 곳도 바로 여기라고 했습니다. 그리고선 사람들에게 그 밀영과 통나무집을 참배하도록 강요하였습니다. 뒤편 산봉우리의 이름을 '정일봉'으로 짓기도 했습니다. 그 모두가 뻔뻔스러운 조작입니다.
1942년 김정일이 태어난 곳은 소련령 하바로프스크입니다. 그것은 천하가 아는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누구도 그렇게 말하지 못합니다. 두렵기 때문입니다. 순진한 아이들은 그것을 사실로 믿습니다. 날조가 신화로 변하면서 마성의 권력으로 군림하는 과정입니다.
오늘날 북한은 그 같은 신화로 유지되는 신정체제의 국가입니다.
남북 공명의 정신사
신화의 날조가 북한만의 시대착오적 현상이라고 생각하면 큰 오산입니다. 비슷한 현상은 남한에도 있습니다. 남과 북의 정신문화는 친근한 모습으로 공명합니다. 같은 민족이기 때문입니다. 남한에서 벌어진 그와 유사한 현상을 시인 고은에게서 찾을 수 있습니다. 한동안 한국 언론이 노벨 문학상 수상자로 기대했던 잘 알려진 인물이지요. 1987년 북한이 구호목을 발견했다고 발표한 바로 그해에 고은은 백두산 이란 장편 서시를 발표했습니다.
이 서시는 양반 감사댁 아씨와 꼴머슴 김돌만의 동반 도주로 시 작합니다. 신분을 초월하여 사랑을 한 청춘남녀는 철령의 어느 바위 동굴에서 아기장수 바우를 출산합니다. 추격대에 쫓긴 세 식구는 백두산 밀림에 숨어듭니다. 어느 날 돌만은 백두산 상봉에 올라 바우를 천지에 세 번 담급니다. 누구도 범할 수 없는 아기장수 바우의 액운을 씻는 의례였습니다. 이제 바우의 나라가 백두산에서 열릴 것이다. 그 김바우가 벌이는 독립투쟁과 혁명의 드라마가 장편 서시 「백두산」입니다.
그 김바우가 누군지 독자 여러분은 이미 짐작했을 터입니다. 김바우는 북한의 수령 김일성입니다. 시인은 그렇게 이야기하고 있지 않지만, 20세기의 한국사는 그렇게 여길 수밖에 없는 맥락입니다.
시인이 전혀 의식하지 못했을 수도 있습니다. 백두산에 세워질 김바우의 나라는 시인의 내면에서 자연스럽게 솟아난 것일 수 있습니 다. 그 편이 더 공정한 비평일지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그 나라는 현실의 북한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남과 북의 정신세계는 무의식에서 공명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떠냐고, 좋지 않으냐고 말하지 마십시오. 저는 그러한 산중에 고립된, 동굴에 은닉된, 산적의 세계를 거부합니다. 자유로운 개인, 독립하는 개체, 충일한 개성, 고양하는 예술, 과학 하는 정신, 협력하는 사회, 경쟁하는 기업, 세계와 통상하는 나라, 그러한 아름다움이, 다시 말해 근대 문명이 거기에 없기 때문입니다.
백두산 천지의 네 사람
2018년 9월 문재인 대통령은 북한의 3대 세습 통치자 김정은과 평양에서 정상회담을 하였습니다. 그리고선 백두산 천지에 올랐습니다. 이미 설명했듯이 그곳은 북한 신정체제의 토대를 이루는 신성한 공간입니다. 거기에 남한의 대통령이 올라 백두혈통의 계승자와 손을 마주 잡고 파안대소하는 모습은 어떠한 운명을 우리에게 예보하는 것일까요. 사진 속 문 대통령의 웃음은 보는 이로 하여금 더없이 착잡한 생각을 하게 합니다. 백두산 신화의 마력은 저토록 강렬한 것일까요.
지난 2000년 평양에 간 김대중 대통령은 장차 남북한이 연방제로 통일할 것을 약속했습니다. 사진 속의 네 사람은 그 약속을 다짐하며 웃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잘 알려진 대로 문 대통령과 그의 지지세력은 그러한 속내를 숨기지 않고 있습니다. 그들의 소원대로 연방제 통일이 이루어졌다 칩시다. 벌써 남한 주민의 적지 않은 무리가 공공연히 백두혈통을 칭송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떼를 지어 백두산 밀영의 통나무집으로 참배차 몰려갈 것입니다. 그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은 공포에 질린 얼굴로 그 행렬에 동원될 것입니다. 백두산에 뿌리박은 박달 겨레 여러분, 하루빨리 그 불길한 신화로부터 해방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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