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안무치
1964년 봄 야당 정치인 윤보선(민정당)과 박순천(민주당) 등은 대학생들과 더불어 박정희 정부의 한일회담 추진을 결사반대 했습니다. 한일회담이 굴욕매국 외교라는 이유에서였습니다. 대학생들이야 잘 몰라서 그랬다고 할 수도 있지만, 과거 민주당 정권 출신 야당 인사들이 한일 국교 정상화를 굴욕 매국 외교라고 매도한 것은 후안무치한 일이었습니다.
제가 이렇게 강한 표현을 쓰는 것은 야당 인사들 역시 자신들이 정권을 잡고 있던 때에는 똑같이 한일 국교 정상화를 추진했기
때문입니다.
반일 기조가 강한 이승만 정권이 무너진 후 민주당 정권이 세워지니 한일 관계는 급속히 화해 국면으로 전환되었습니다. 민주당 정권의 첫 외무장관 정일형은 8월 24일 신외교 방침의 하나로, 하루속히 대일외교를 정상화하겠다고 밝혔습니다. 일본도 발 빠르게 움직였습니다. 9월 6일 일본 고사카 젠타로 외상이 내한했습니 다. 건국 후 처음 있는 일본의 공식 사절단이었습니다.
이어서 10월부터 제5차 한일회담이 열려서 이후 7개월 간 회담이 진행되었습니다. 청구권, 어업, 재일 한국인의 법적 지위 등 분과별로 실무 레벨의 회담도 진행됐습니다. 이중 청구권위원회는 과거와 달 리 33회의 회의에서 실질적 토의에 들어갔습니다. 회담에서 일본은 한국 측에 재한 일본인 재산 취득을 고려해서 청구권을 조정해 달라고 했습니다.
장면 정부의 청구권 교섭
앞에서 소개했습니다만, 옛 일본인 재산의 취득으로 한국의 청구권이 어느 정도 충족되었다는 미국 측 중재 의견이 있었습니다.
일본의 주장에 따르면, 한국의 청구권 금액이 대폭 줄어듭니다.
한국이 8개 항 청구권을 요구했지만, 재한 일본인 재산을 이미 취득했으므로, 양사가 상쇄되어, 한국의 청구권 금액은 제로가 되거나 극히 소액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에 장면 정권은 다음과 같은 논리로 대응했습니다.
"원래 한국은 식민지하 한국인의 고통, 손해에 대한 배상까지 요구하려 했는데, 재한 일본인 재산 취득 사실을 고려해서 8개 항만 요구 했다"는 겁니다. 한국은 재한 일본인 재산을 취득했으므로 8개 항만 요구한다는 게 장면 정권의 대응 논리였습니다.
이는 8개 항 요구를 지키려고 만들어 낸 논리였지만, 실은 엄청난 자충수였습니다. 왜냐하면, 재한 일본인 재산의 취득으로 이미 식민 지배에 따른 고통, 손해를 배상받았다는 말이 되기 때문입니다. 일본이 한국의 주장을 받아들였다면, 식민지배 피해를 이미 배상, 보상받은 것이 되어서, 8개 항 청구권이 하나씩 논파당한 경우 일본에서 받을 금액이 형편없이 쪼그라들 것입니다. 또 추가로 독립축하금이나 경제원조자금을 받기도 어려웠을 것입니다.
무상 3억 달러 합의는 장면정부였어도
또 회담에서는 8개 항 중 제5항까지 개별 항목을 검토했는데, 장면 정권은 개별 항목에 대해 일본 측을 납득시킬 만한 근거를 제시하지 못했습니다. 예를 들어 제5항 한국 법인과 개인의 재산 청구권과 관련해서, 한국 측은 피징용 생존자, 부상자, 사망자, 행방불명자, 군인군속 전체에 대한 보상을 요구했습니다. 일본이 다른 나라 국민을 강제로 징용하고 정신적, 육체적으로 고통을 준 데 대하여 상당한 보상을 하라는 거였습니다. 이에 대해 일본 측은 징용 당시 한국인은 일본의 국민이었으므로 생존자에 대해서는 보상할 수 없고, 부상자와 사망자 등에 대해선 이미 피해 당시 보상이 이루어졌다고 반박했습니다. 또 한국 측이 피징용 노무자의 미수급료와 수당으로 2억 5000만 엔을 요구한 데 대해 일본 측이 그 산출 근거를 물었지만, 한국 측은 답변하지 못했습니다.
장면 정권의 한일회담은 재개한 지 7개월 만에 5.16 쿠데타로 중단되었습니다만, 설령쿠데타가 일어나지 않아 회담을 계속했더라도 그 청구권 주장은 일본 측에 하나하나 반박당했을 겁니다. 그를 이은 박정희 군사정부의 청구권 주장도 일본 측을 납득시키지 못하고 하나하나 반박당했습니다. 청구권 금액과 관련해서 한일 양국의 입장에는 약 10:1의 격차가 있었습니다. 이에 '청구권 순변제 + 무상 원조'라는 명목으로 형식을 바꾸고 금액을 상호 조정해서 무상 3억 달러라는 합의에 도달했습니다. 5.16이 일어나지 않아 장면 정권이 교섭을 계속했더라도 같은 방식으로 타결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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