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정권의 한일협정 조인의 추진
박정희 정권은 1963년에는 민정 이양 과정의 혼선과 대통령 선거 때문에 한일회담을 진척시키지 못했습니다. 그해 12월 민정으로 재출범한 박정희 정부는 본격적으로 한일협정 조인을 추진합니다. 이제 야당이 된 과거 장면 정권 인사들은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한일협정 반대에 나섭니다. 국회가 구성되고 나니 소수 야당도 강력한 저항과 비판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1964년 3월 6일, 4개 야당이 '대일 저자세 외교 반대 범국민 투쟁 위원회'를 결성했고, 9일에는 여기에 사회, 종교, 문화 단체 대표까지 포함해서 200여 명이 '대일 굴욕외교 반대 범국민 투쟁위원회'를 결성해서 회담반대운동을 조직적으로 전개합니다. 명칭에서 보는 것처럼, 이들은 한일회담에 대해 '굴욕매국외교'라는 프레임을 씌웠습니다. 투쟁위원회 의장은 윤보선이 맡았습니다. 투쟁위원회는 한일회담의 즉시 중지, 일본의 반성, 민족정기 고취를 슬로건으로 내걸고, 그 대안으로 재산청구권 15억 달러와 배상금조 12억 달러 등 도합 청구권 27억 달러, 평화선 40해리 전관수역을 제시했습니다. 일본이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자신들도 민주당 정부 때 제기한 바 없는 황당한 요구였습니다. 이 투쟁위원회는 3월 15일부터 회담 저지를 위한 전국 유세에 돌입합니다. 야당의원이나 재야인사는 무책임한 발언도 서슴지 않았습니다.
대규모 학생 시위
그리고 3월 24일에는 서울에서 4•19 이후의 첫 대규모 학생 시위 가 벌어지고, 각 지방도시에도 파급됩니다.
이에 대해 박정희 대통령이 아래와 같이 3월 26일 특별담화로 이들을 간곡히 설득했습니다. 특별담화의 일부를 소개합니다.
그리고 일본에 갔던 김종필을 본국에 소환했습니다. 박 대통령은 3월 30일에는 서울시 소재 11개 대학 학생 대표를 면담해 대일 외교에 관해 학생들과 의견을 주고받기까지 했습니다. 그렇지만 5월부터는 학생 시위가 더 확대되었을 뿐 아니라 박정권 타도를 표방하기 시작했습니다. 서울대생들은 5월 20일 '민족적 민주주의 장례식'을 열어 한일회담은 '민족적 긍지를 배반하고 일본 예속화를 촉진하는 굴욕적 회담'이라 비판했습니다. 이 데모 때 서울대 미학과 학생이던 훗날의 저항시인 김지하가 박정희 정부를 시체로 조롱하는 조문을 쓰기도 했지요. 6월 3일에는 서울의 학생 시위에 일반 시민까지 가담해서 치안이 마비되는 상태에 이르렀습니다. 결국 박정희 정부는 그날 저녁 서울 일원에 비상계엄을 선포해 군을 투입하고 대학에는 휴교령을 내립니다. 바로 6.3 사태입니다.
그 후 한일회담은 1년이나 지연되었습니다. 시간만 끌었을 뿐입니다. 하지만 1965년에도 야당은 또 한일회담 저지에 나섭니다. 5월에 통합 야당 민중당을 만들어서 저지운동을 합니다. 야당의 맹목적 반대에 직면한 박정희 정부는 8월 여당 단독으로 한일협정의 국회 비준을 강행합니다. 이에 야당은 의원직 사퇴로 맞서는데, 특히 윤보선은 끝까지 의원직 사퇴를 고수해서 결국 야당까지 분열시키기에 이릅니다.
5.16이 없었더라면 민주당 정부도 박정희 정부와 같은 방식대로 한일협정을 체결했을 겁니다. 그럼에도 이들은 야당이 되었다고 해서 정부의 외교를 매국의 외교라고 매도하면서 막무가내로 반대했습니다. 사실 1964년에 박정희 정부는 경제개발에 쓸 외화가 절실히 필요했습니다. 하지만 야당은 자신들의 당리당략만을 위해 반일 감정을 선동 조장하면서 정부의 정상적인 정책 추진을 막았습니다. 그들도 과거 자신들이 집권했을 때에는 역시 한일 국교 정상화를 서두른 바 있습니다. 일례로 장면은 1961년 1월 1일 자 「동아일보」와의 회견에서 새해 안으로 한일 국교 정상화가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라 강조하며, 무턱대고 일본 정부나 국민과 감정적으로 대립하는 것은 실수라고 말한 바도 있습니다.
누가 진짜 굴욕적이었나
한편, 윤보선 등 한일회담 반대자들은 한일협정이 되면 한국이 일의 지배를 다시 받을 거라고 예언했습니다. 윤보선은 1965년 3월 부산 강연에서 "한일회담은 이 나라를 망하게 하는 정말로 큰 일이다. 한일회담이 되면, 우리는 즉각 일본에 정치적, 경제적으로 예속 될 것"이라 비판했습니다. 당시 많은 사람들이 한일 국교 정상화 후 일본 공업제품과 기업이 한국을 휩쓸 것이라고 염려했습니다.
그런데 한일회담이 되면 우리가 즉각 일본에 정치적, 경제적으로 된다니, 이렇게 자신 없고 패배주의적인 태도가 또 어디 있겠습니까? 박정희 대통령은 한일협정 조인 다음날인 6월 23일 특별담화를 냈습니다. 거기서 박 대통령은 다음과 같이 한일회담 반대 론자들을 논박했습니다.
윤보선과 박정희 두 사람의 말 중 누구 말이 맞았습니까? 지금 한국 경제가 일본에 예속되어 있습니까? 아니면 그동안에라도 예속되었다가 얼마 전에 해방되었습니까?
오랫동안 우리는 대일 무역적자를 경제적 예속의 한 지표로 봤습니다. 지금도 한국은 일본에 대해 무역적자를 보고 있습니다만, 한국 경제의 대일 예속을 문제 삼는 사람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한국이 경제발전을 통해 일본과의 격차를 대폭 줄였기 때문입니다. 무역적자 여부가 중요하다면 오늘날 중국은 한국에 경제적으로 예속되어 있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한국이 일본과 국교 정상화를 한 후 일본이 지급한 무상 3억 달러가 10년간 연 3000만 달러씩 들어왔습니다만, 미국 원조금액보다 훨씬 적었습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한국과 일본 간에 무역 통상과 경제협력이 활발하게 이루어진 것입니다. 당장은 일본의 자본, 기술, 설비, 중간재를 들여와 조립가공한 후 미국에 수출하는 무역이 발달했습니다. 한미일 3각 무역구조라고도 합니다. 그 덕분에 경공업 공산품 수출이 급증했습니다.
그 후 한국은 일본의 설비와 중간재에 의존하는 데 머물지 않고 적극적으로 공업 구조를 고도화해 갔습니다. 즉, 중화학공업화를 추진했습니다. 여기서 일본 정부와 기업의 협력이 크게 도움이 되었습니다. 포항제철이라는 한국 최초의 종합제철소가 세워진 것은 일본의 자금, 기술, 협력 덕분이었습니다. 당시 일본의 제철업은 세계 최고 수준의 경쟁력을 갖고 있었는데, 포항종합제철소는 일본 기업 기술진의 협력으로 세워졌습니다. 일본 정부는 종합제철업을 통해 한국 경제가 강해지는 게 일본에도 좋다는 인식으로 협조했습니다. 또 현대중공업은 일본 조선소로부터의 기술 학습에서 큰 도움을 받았습니다.
물론 일본이 한국을 도와주었다는 이야기만은 아닙니다. 일본도 한국과의 경제협력으로 플랜트 수출 등 이익을 봤습니다. 한마디로 한국 경제와 일본 경제 모두 한일 국교 정상화로 큰 이익을 봤습니다.
한일 국교가 정상화되면 한국은 일본의 정치적, 경제적 식민지가 된다는 한일회담 반대론자들의 예언은 어리석은 소견이었을 뿐입니다.
한일회담 반대론자들은 약육강식의 제국주의 시대가 끝났고 선후진국 협력의 새 시대가 열렸다는 것을 전혀 몰랐습니다. 문 밖에 나가면 사자에게 잡아먹힌다며 안에서 꼼짝도 안 한 것과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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