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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학도지원병, 기억과 망각의 정치사

by 스튜디오윤 2023. 10.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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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도지원병제란?

1944년 1월 20일 조선인 학도지원병 3,050명은 특별지원의 형식으로 일본군에 입영했습니다. 해방 이후 학도지원병 출신자들은 자신들을 '민족의 십자가를 걸머진 젊은 지식인'이었다고 주장했습니다.

재일교포 출신의 한국 근대사 연구자 강덕상은 학도지원병을 지원을 가장한 강제동원으로 규정했습니다. 2018년 1월 대한민국 행정 안전부는 「일제의 조선인 학도지원병 제도 및 동원부대 실태 조사 보고서 (이하, 행안부 보고서)를 발표했습니다. 행안부 보고서는 일본군을 탈영해서 광복군에 투신했던 학도지원병을 독립유공자로 서훈 현창 하는 한편, 이들의 학도지원을 독립운동으로 격상시켜야 한다고까지 주장했습니다. 과연 학도지원이 일제의 기만에 찬 강제동원이었고, 민족의식으로 충만한 독립운동이었을까요?

1943년 10월 20일 일본 육군성은 전문학교와 대학의 법문제에 재학 중인 조선인 학도를 대상으로 학도지원병을 모집하는 1943년도 육군특별지원병 임시채용 규칙을 공포했습니다. 1943년 8월 조선인 징병령이 정식으로 공포된 상황에서 학도지원은 일본인의 학도출신과 동일한 국민의무의 이행으로 간주되었습니다. 조선총독부는 1943년 10월 25일부터 11월 20일까지 지원자 접수와 12월 11일부터 20일까지 적성검사를 거쳐 입영학도를 선발했습니다. 학도지원병 합격자는 1943년 12월에 군무교육을 거쳐 1944년 1월 20일 일본군에 입영했습니다.

학도지원의 총수와 실태

종래 강덕상의 연구와 행안부 보고서는 학도지원 적격자 6,203명 가운데 4,385명이 일본군에 입대했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는 학도지원병의 실태와 선발 과정을 전체적으로 살피지 못한 문제점을 안고 있습니다. 1944년 일본 정부의 자료에 따르면, 학도지원 적격자는 모두

6101명이었습니다. 그 가운데 4,610명이 지원을 하고, 1,491명이지원을 회피하였습니다. 그리고 지원한 사람 가운데 실제 적성검사를 받은 사람은 4,217명, 91%였습니다. 그리고 적성검사를 받은 사람으로서 합격자는 3,117명이었습니다. 그 가운데 정식 입영자는 질병 및 기타 사유 67명을 제외한 3,050명이었습니다.

이 같은 학도지원의 실태는 그것이 종래 알려진 것처럼 무조건 강제 된 것이 아니었음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적격자로서 지원을 하지 않은 사람도 24%나 되었고, 지원을 하고서도 적성검사를 회피한 사람도 있었고, 적성검사에 불합격한 사람도 많았습니다. 실제로 경성제국대학생으로서 학도병 지원을 했다가 적성검사를 거부한 서명원은 "1차 신체검사를 한 뒤 2차에 빠졌기 때문에 마감일을 넘길 수 있었다. 마감일을 넘기고 징용을 가면 그만이었다"라고 회고하였습니다.

당시는 전시기였으며, 젊은이들은 군대에 가든 공장에 가든 강요 받은 분위기였습니다. 서명원은 어느 쪽이든 선택은 자기의 몫이었음을 회고하였던 것입니다. 다시 말해 학도지원 병제는 단순히 '지원을 가장한 동원'으로만 단정하기 힘든, 지원자들의 분별력 있는 판단과 욕망이 개재된 복잡한 과정이었습니다.

 

천재일우의 기회

학도지원병은 입영 이후 간부후보생을 자원해 일본군 초급장교 로 임신할 수 있는 특혜가 주어졌습니다. 당시 조선인 청년들에게 일본군 장교가 된다는 것은 하늘의 별과 같은 선망의 대상이었습니다. 학도지원은 군인으로 변신해서 경제적 안정과 사회적 지위를 보장받는 입신출세의 지름길이었습니다. 그래서 당시 세간에서는 학도지원을 '천재일우의 기회'라고도 했습니다. 간부후보생에 채용되면, 이들은 6개월의 집체교육을 거쳐 갑종(장교)과 을종(하사관)으로 구분되었습니다. 이 가운데 갑종 간부후보생은 재차 육군예비 사관학교의 6개월 집체교육과 수습사관 생활을 거쳐 예비역 육군 소위로 임관했습니다.

학도지원병의 간부후보생 지원은 입영학도 3,050명 중 1,869명 으로 61.3%의 지원율을 기록했습니다. 간부후보생 합격자는 갑종

403명과 을종 460명으로 합계 863명이었고, 합격률은 46.2%였습 습니다. 이들 합격자는 간부후보생 교육기간에 걸쳐 높은 전사율을 기록했던 남방전선 파병도 유보되었습니다. 간부후보생 합격자의 집체교육은 한여름의 찌는 듯한 무더위 속에서 실시되었습니다. 그럼에도 이들은 방독 마스크를 착용한 10킬로미터 무장구보를완주하는정신력을 발휘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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