쇠말뚝 신드롬
"일제가 조선 땅에서 인물이 나는 것을 막으려고 전국 명산에 일부러 쇠말뚝을 박아 풍수침략을 했다는 거 아닙니까!" 그동안 우리 사회에는 이런 말이 전설처럼 떠돌았습니다. 과연 그럴까요? 이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모두 거짓말입니다. 일제가 박았다는 쇠말뚝이 모두 가짜라는 사실은 제가 월간조선, 1995년 10 보호에 썼던 「대한민국의 국교는 풍수도참인가?」라는 기사를 통해 냈습니다. 이 기사가 보도된 후 독립기념관이 전시하던 쇠말뚝을 치웠는데, 이 내용을 구로다 야스히로 기자가 취재해 산케이신문 사회면 톱기사로 보도하였습니다.
우리 사회에 쇠말뚝 신드롬을 몰고 온 계기는 김영삼 정부가 들어선 후 1995년 2월, 광복 50주년 기념 역점추진사업으로 쇠말뚝 제거 사업을 추진하면서였습니다. 그 전까지는 주로 민간 차원 '우리를 생각하는 모임'이라는 단체와 서경대 경제학과 서길수 수가 쇠말뚝 제거 사업을 추진해 왔습니다. 그런데 문민정부라고 선언한 김영삼 정부가 느닷없이 나서면서 쇠말뚝 뽑기가 일종의 국책 사업으로 격상된 것입니다.
정부가 나서기 전까지 민간인들이 '일제 쇠말뚝'이라 하여 제거 실적을 보면 북한산에서 17개, 속리산 문장대에서 8개, 마산 무각산 학봉에서 1개가 제거된 것이 전부였습니다.
증거 없이 민간인들이 제한 쇠말뚝
하지만 민간인들 이 제거한 쇠말뚝은 일본인들이 풍수침략을 위해 박았다는 어떠한 증거도 없이 그저 믿거나 말거나 하는 차원에서 뽑아낸 것이 거의 전부였습니다. 북한산 쇠말뚝은 1984년 백운대 산행을 나섰던 민간단체가 등산객들로부터 왜인들이 서울 정기를 말살하기 위해 박은 철주로라는 설명을 듣고 제거한 것입니다. 문제의 이 쇠말뚝이 독립기념관의 일제침략관에 전시되어 우리 사회에 '쇠말뚝 신드롬'을 확 산시키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백운대 쇠말뚝 제거에 참여했던 풍수가나 서길수 교수, 쇠말뚝 제거 단체인 '우리를 생각하는 모임'의 구운서 회장 등 어느 누구도 백운대 주변에 박혀 있던 쇠말뚝이 일제가 풍수집략용으로 박은 것이라 사실을 합리적이고 객관적이며 과학적으로 입증할만한 근거를 제시하지 못했습니다. 그저 소문과 구전이 확실하니 일제의 소행입이 분명하다는 수준이었습니다.
역술인, 지관을 쇠말뚝 전문가로 동원
독립기념관도 백운대 쇠말뚝을 과학적으로 조사, 연구 분석하지 않고 기증자들의 말만 믿고 전시했습니다. 이처럼 거의 미신 수준에서 떠돌던 증언을 근거로 김영삼 정부가 광복 50년을 맞아 딜적 일을 저질러 버린 것이 쇠말뚝 제거 사업이었습니다.
청와대의 지시를 받은 내무부가 전국의 각 시군읍면에 공문을 보내 기세등등하게 사업을 시작하면서 심각한 문제가 발생했습니다.지방 행정관청은 자기 마을에서 발견된 쇠말뚝이 풍수침략을 위해 일본이 박은 것이란 사실을 입증해 줄 전문가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지방 행정기관은 동네에서 풍수를 좀 볼 줄 안다는 지관이나 역술인, 속칭 점쟁이들을 쇠말뚝 감정 전문가로 동원했습니다.
1995년 2월 15일부터 8월 14일까지 6개월간 전국에서 접수된 주민신고는 모두 439건, 이중에서 일제가 박은 쇠말뚝으로 밝혀져 제거된 것은 18개였습니다. 제가 월간조선 기자 시절 전국 18곳의 말뚝 제거 현장을 찾아가 주변 사람들, 공무원, 전문가들에게 확인한 예를 몇 가지 소개합니다.
쇠말뚝 감정 전문가
금오산에서 제거된 쇠말뚝을 감정한 전문가는 대구의 역술인 김한식었습니다. 그는 금요산 쇠말뚝이 박혀 있는 장소가 풍수적으로 방탕이라고 했습니다. 용이 하들로 용솟음치는 듯한 곳에 누워 있는 부처의 이마 부분에 쇠말뚝이 박혀 있었다는 겁니다. 제가 그에게 "그렇다면 이 쇠말뚝이 일제가 박았다는 과학적이고 객관적인 증거가 무엇인지"를 묻자 그는 "증거는 없지만 금오산은 풍수적 관점에서 대단히 중요하기 때문에 일제의 소행으로 추정한 것"이라고 말하더군요. 제작 시기도 겉 부분의 부식 정도로 추정만 했을 뿐 다른 검증 절차는 거치지 않았다고 실토했습니다.
경북 김천시 봉산면 광천리의 눌의산에서 발견된 쇠말뚝도 금오산 사례와 똑같이 대구 역술인 민승만 씨가 금오산과 비슷한 이유로 일제 쇠말뚝으로 감정했습니다. 충북 영동군 추풍령면 마암산 운수봉에서도 쇠말뚝이 제거됐는데 영동군청 담당 공무원은 "일제가 박았다는 근거가 없어 긴가민가하면서 뽑았다"라고 실토했습니다.
의혹투성이의 쇠말뚝은 1995년 6월 5일 오후 성대한 산신제와 함께 제거되었습니다. 푸닥거리 비슷한 산신제와 쇠말뚝 제거행사는 일본 NHK, TBS 동경방송이 취재를 나와 촬영을 해 갔다고 합니다.
충북 단양군 영춘면 상1리 남한강 북벽 입구에서도 세 개의 쇠말뚝이 발견됐습니다. 제보자들은 1894년 무럽 영춘면에서 의병과 일본군 간에 큰 전투가 벌어졌는데, 항일운동이 다시 일어나지 못하도록 일제가 장군소 앞에 쇠말뚝을 박은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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