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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광업기술의 발달과 기계화로인한 차별의 허구성

by 스튜디오윤 2023. 10.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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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업배치부터 조선인을 차별?

반일 종족주의 역사학자들은 조선인들을 의도적으로 고되고 위 험한 작업에 배치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탄광에서 갱외보 다는 갱내, 갱내에서도 가장 어렵고 위험한 일, 다시 말해서 탄을 캐는 채탄부, 갱을 파 나가는 굴진부, 갱도가 무너지지 않도록 목재 등으로 구조물을 만드는 지주부치, 이와 같은 일에 조선인들을 강제로 배치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작업현장에서의 민족차별론은 사실과 전혀 다릅니다..

우선 많은 사람들이 증언하기를, 일본인들과 같은 자리에서 함께 작업했다고 하였습니다. 조선인과 일본인이 각각, 네 명과 세 명, 세 명과 두 명, 이런 방식으로 작업조를 짜서 같이 일했다는 것입니다.

일본인과 조선인이 함께 작업하는데, 어떻게 조선인만 어렵고 위험한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탄광의 근로 실태에 대해 전혀 모르는 사람이나 할 수 있는, 황당한 이야기에 불과합니다.

 

광업기술의 기술혁신

광업기술의 역사를 보아도 작업배치에 있어서의 민족차별이라 는 주장은 전혀 근거가 없습니다. 1930년 경부터 일본 탄광에서는 두 가지 큰 기술혁신이 있었습니다. 그 첫째는 장벽식 채탄이라는 새로운 기술입니다. 과거에는 소수, 다시 말해 2~3명이 한 조 를 이뤄 탄맥을 따라 여러 조가 어지럽게 파고들어 가는 방식이었습니다. 따라서 많은 석탄이 미처 채굴되지 못한 채 남아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장벽식 채탄법에서는 큰 갱도를 탄맥을 따라 나란히 길게 팝니다. 그 길이가 무려 200미터 이상이 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이때, 조선인과 일본인 5~7명이 한 조가 되고, 각 조가 약 5~6미터의 간격으로 나란히 서서 일제히 작업하는 것이 장벽식 채탄법입니다. 이 방법에 의해 이전보다 훨씬 효율적으로, 탄맥 전체의 석탄을 모두 캐낼 수 있게 되었습니다.

두 번째 기술혁신은 기계화였습니다. 1929년 세계 대공항 이후, 본 광업에서도 인건비를 줄이기 위해 기계화를 급속도로 추진하였습니다. 앞서 착암기를 사용하는 모습을 보았는데, 1930년대가 되면 coal cutter, 즉 석탄 재단기와 석탄을 옮기는 기계식 컨베이어도 널리 사용되었습니다. 조선인이 배치되었던 1939년 이후 대규모 탄광에서는 이와 같이 기계화가 크게 진전되어 있었습니다.

장벽식 채탄법 하에서 만약 조선인만으로 작업조를 짠다고 합시다. 이때 조선인 작업조가 높은 숙련도를 요구하거나, 또는 위험한 절우를 만나게 되면, 조선인만으로 구성된 작업조가 담당한 절우는 다른 막장들과 다르게 돌출되어 튀어나오게 됩니다. 그러면 전체 작업조가 하나의 큰 컨베이어를 사용하고 있는데, 조선인이 담당하는 막장만 돌출하게 되고, 일자로 놓여 있는 컨베이어를 동시에 일직선으로 탄맥에 따라 옮길 수 없게 됩니다. 따라서 하나의 조선인 작업조 때문에 전체의 채탄 작업에 큰 손실이 발생합니다.

이런 이유로 반드시 조선인과 일본인을 한데 묶어 작업조를 편성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기계화와 숙련도

기계화는 그 자체만으로도 조선인에 의한 독립적인 작업조의 편 성을 불가능하게 하였습니다. 그간 농사만 지어 온 조선인들이 기 계식 드릴, 압축식 착암기, 소형 굴삭기, 컨베이어를 조종하려면 오랜 시간에 걸친 훈련과 기계에 대한 지식이 필요했습니다.

기계화로 인해 화약, 다이너마이트의 효율성은 크게 높아졌습니다. 골과 망치 대신에 기계식 드릴로 구명을 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전보다 훨씬 깊은 구멍을 뚫고, 거기에 폭약을 설치함으로써, 일거에 대량의 석탄을 분쇄해 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것을 발파식 채탄이라고 하며, 이와 같은 기술이 급속히 확산되었습니다. 그에 따라 숙련된 광부의 필요성도 더욱 커졌습니다. 왜냐하면 폭약이 광범하게 이용되면서 갱도가 붕괴되거나, 천장이 무너지는 낙반 주요 등 막장에서 사고가 발생할 가능성도 동시에 높아졌고, 이런 경우에는 다수 광부가 사망하거나 크게 다치는 대규모 탄광사고가 일어날 가능성이 더욱 높아졌기 때문입니다. 이를 막으려면 잘 숙련된 일본인들을 경험이 없는 조선인들과 한데 묶어서 함께 작업하게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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