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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상의 섬 독도-역사적 그 실체를 찾아서 환상 판명 1883년에 개방된 이래 울릉도의 인구는 1900년까지 1,000명으로 증가하였습니다. 일본인도 많이 살았는데, 주로 강치잡이를 위해 서였습니다. 이에 1900년 대한제국은 칙령 41호를 내려 울릉도를 군으로 승격하고 군수를 파견하였습니다. 그때 군의 영역을 정하기를 “울릉 전도와 죽도와 석도해를 관할한다"라고 했습니다. 죽도는 오늘날의 죽도 그것입니다. 문제는 석도입니다. 그것을 두고 오늘날의 한국 정부나 학자들은 독도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한국이 독도 고유영토설을 주장할 때 또 하나의 강력한 근거로 제시되는 것이 바로 이 석도=독도설이라 하겠습니다. 과연 그러합니까? 그보다 앞서 이 칙령 41호에 의해 우산도가 그 종적을 감추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후 우산은 어느 자료에.. 2023. 10. 24.
반일종족주의의 최고 상징 독도-안용복 사건 안용복 사건 18세기 이후 여러 지도에서 우산도의 위치가 울릉도의 서쪽에서 남쪽으로, 그리고 동쪽으로, 나아가 북동쪽으로 떠돈 것과 관련해서는 17세기말의 안용복가 사건을 고려할 필요가 있습니다. 앞서 지적한 대로 조선왕조는 1417년 이래 울릉도를 비웠습니다. 17세기가 되면 일본 어민들이 이 섬을 죽도라고 부르면서 해마다 정기적으로 찾아와 고기도 잡고 나무도 벌채하였습니다. 이윽고 그들은 울릉도를 일본의 영토로 간주하기 시작했습니다. 1693년 동래 부부의 안용복이 일행과 함께 울릉도에 고기를 잡으러 갔다가 일본 어민들과 충돌하였습니다. 사료에 따라 다릅니다만, 안용복은 일본 어민에게 잡혀서인지 아니면 그들을 따라서인지 일본으로 가서 울릉도가 조선의 영토임을 주장합니다. 그리고선 대마도를 거쳐 동래부.. 2023. 10. 22.
독도, 반일종종주의의 상징-존재하지 않던 섬 15세기 초까지도 한 개의 섬 여러 자료를 검토하면 조선왕조 15세기 초만 해도 울진현 동쪽에 우산과 무릉 두 섬이 있다는 인식은 없었습니다. 1402년 권근 등 조선왕조의 엘리트 관료들이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라는 지도를 그렸습니다. 그 지도에 나타난 울진현 동쪽 바다입니다. 보다시피 울진포 바깥 바닷속의 섬은 울릉도 하나뿐입니다. 그 점에서 나중에 소개하는 조선시대의 지도와 큰 차이를 보입니다. 그렇게 원래 섬은 하나였으며, 그 이름은 울릉 도였습니다. 그런데 그 섬은 '우산도'라 불리기도 했습니다. 1417년의 「태종실록」을 보면 김인우라는 관리가 '우산도'를 탐사하고 돌아와 인구가 15호에 86명이라고 보고하는 기사가 나옵니다. 그 우산도가 곧 울릉도였습니다. 언젠가 우산국이 사라지자 울릉도는 우.. 2023. 10. 21.
독도, 반일 종족주의의 최고 상징-삼국사기 독도는 한국인을 지배하는 반일종족주의의 상징 독도는 오늘날 한국인을 지배하는 반일 종족주의의 가장 치열한 상징입니다. 남북한을 통틀어 민족주의의최고 상징을 들자면 아무래도 백두산입니다. 그런데 백두산은 조선시대부터 나름의 큰 상징으로 내려온 것입니다. 거기선 반일 종족주의가 직접 드러나지 않고 저변에 잠복해 있습니다. 독도는 그렇지 않습니다. 차츰 설명하겠습니다만, 조선시대에는 독도에 관한 인식이 없었습니다. 독도는 대한민국 성립 이후, 그것도 지난 20년 사이에 급하게 반일 민족주의의 상징으로 떠오른 것입니다. 독도는 한국과 일본이 다투는, 한국의 입장에선 양보가 불가능한 상징입니다. 그런 만큼 그에 대한 이의 제기는 대중으로부터 세찬 공격을 받을 위험성이 큽니다. 그렇지만 저는 대중의 인기에 신경을 .. 2023. 10. 20.